활동소식
‘지역’이 진보이다
겨울, 추위의 시작이다. 한라산에는 예년 보다 일찍 많은 눈이 내렸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 원주, 부안, 전주 등지를 다녀 왔다. 공동체 운동이 활발하다는 서울의 성미산 마을도 가보게 되었다.
부안에서 만난 어느 분은 부안과 제주과 참 비슷한 곳이라는 말을 들려 주었다. 과거 시대에 부안은 역사적으로 유배지이면서, 민란의 땅이기도 하단다. 제주와 유사하다. 오늘 날에도 새만금, 핵폐기장 문제로 주민들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 또한 군사기지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제주와 닮아 있다. 부안으로 가는 길에 지나친 군산은 어느 덧 군사도시화 되는 징조를 보았다.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지역’은 오늘 날에도 국가의 필요에 부름받는 동원구조로 머물러 있다. 그 일방주의의 결과로 돌아오는 상처는 두고 두고 ‘지역’이 감내해야 할 몫이 된다.
원주에서 만난 분은 ‘원주의 꿈’에 대해 들려 주었다. 주민이든, 시민활동가이든, 진보정당원이든 모두가 협동네트워크의 일원이면, 이걸 우선시 하는 분위기다. 이들의 횡적 네트워크는 오직 ‘원주’를 매개로 연결돼 있고,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을 구가한다. 이야기를 들려준 그 분은, 서울에서는 결코 희망을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언젠가 TV에서 오키나와 주민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부안 사람들에게는 지리상의 조건이 매개가 돼 ‘독립 의식’ 같은게 있어왔다고 들었는데, 제주에도 그 역사적 연원을 통해 ‘독립’이야기가 세간에 농담처럼 회자된다.
이 경우들은 ‘지역’의 독자성을 매우 강렬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그 만큼 전통적 삶의 양식과 문화적 조건들의 온전한 완결체로서의 지역의 의미를 일깨운다. 중앙중심 논리가 필연코 내포하는 일방주의에 대한 일종의 방어로서 불거져 나오는 반작용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지역’은 ‘지방’이 아니다. 보편이 관철되는 특수한 ‘부분’으로서만 설명될 수 없는 고유한 맥락이 존재한다. 오늘 날, 지역은 국가를 거치지 않고 세계와 소통하는 독자단위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서울중심의 일극체제가 빚어낸 한국사회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이제 ‘지역’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흐름이 생긴지 오래다. 그렇지만 아직 그 흐름은 어떤 물길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지역’을 과거보다 더 후퇴된 형태로 바라 본다. 이명박 정부에 있어서 ‘지역’은 국가의 번영에 복무하는 일개 경쟁력 단위일 뿐이다. 서울을 ‘세계도시’로의 발전을 촉진토록하는 주변부 동력에 불과하다. 서울의 인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역의 몇몇 도시들을 주변과 통합해 만드는 덩어리 체제를 국가발전구조로 놓고, 독자적 단위로서의 ‘지역’들을 이른바 광역경제권으로 묶어 세움으로써, 국가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봉건적 지배구조로 재구조화하려는 의도를 출범초기부터 보여왔다. 지금 벌어지는 세종시 논란도, ‘행정수도이전’이라는 명제는 실종된 채 ‘세종시 수정’이라는 프레임 속에 끌려다니고 있을 뿐이다. 의도했던 바일 것이다.
내년에 벌어지는 지방선거는 현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모호함에서 벗어나 이러한 보다 가치적이고 맥락적인 차원에서 ‘지역’에 대한 논쟁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들이 힘을 합쳐 지역연합의 문제제기를 형성하고, 그것이 다시 지역별 역내 구도로서 자리잡게 해야 한다. 그래야 분권이든, 녹색성장이든, 심지어 4대강이든 오로지 ‘정부사업, 정부예산 따오기’의 삽질경쟁의 시각으로 지역을 몰가치의 늪으로 치환해 버리는 현존 지자체 권력과 대별되는 구도를 전제할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를 향한 여러 논의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MB체제를 돌파하기 위한 이른바 ‘반MB-한나라당’연대에서부터 진보대연합 논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도 폭넓다. 진보정당간의 후보단일화 논의도, 이미 정치참여를 선언한 시민사회 진영과 더불어 ‘제3지대 창당’논의로 까지 구체화된다는 소식도 있다.
비판적 지지론이나 독자후보론과 같은 전통적 틀에 얽매임 없이, 현실을 기반으로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는 분위기다. 어쨌거나, 최소한 MB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절박함이 공통분모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진보개혁세력의 연대를 위해 모든 세력들의 뼈를 깎는 희생과 양보가 있어야 한다”는 최병모 변호사의 주문은 이를 웅변하고 있다.
* 출처 : 레디앙
그런데, 시간이 부족한 것일까? 그것은 다시 ‘서울의 움직임’이다. 그것이 ‘2010 연대’이든, ‘희망과 대안’이든, 진보정당 통합론이든, 모두 서울이 시발점이 되고, 서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투어강연식의 지역기획이 있긴 하지만, 하나의 프로그램일뿐더러, 지방선거를 서울발로 얘기하는 것이 맞나 하는 회의가 앞선다. 이런 식의 논의구조라면, 그것이 실재화된다 하더라도, 정작 지역에서는 중앙중심의 작동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진보정당 정도만 영향을 받을 뿐, 내년 지방선거에서 진보를 새롭게 대변하는 흐름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할 것 같다. 비단 내년 선거만이 아니라, 이번을 계기로 진보개혁의 새로운 실체를 형성한다는 관점에서도 그 접근과 경로의 일방성으로 인해 입체적인 전국전략으로 가기는 힘들다고 보여진다. 그 만큼 ‘지역’의 문제의식은 이미 성장해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 사회운동은 ‘정치’에 대한 욕망이 한껏 성숙해 있다. 욕망이라기 보다는 절박함이다. 지역사회의 변화를 위해 정치는, 그 영역에 대한 인식을 채 가다듬을 새 없이 중요하고 강력한 수단임을 구체적이고 오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체득했기 때문이다. 지역에 있어서 사회변화는 매우 실질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그것은 훨씬 분명한 목표, 구체적인 접근과 동시에 깊숙이 보고, 길게 가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제주에서 벌어진 주민소환은 ‘토대없는 정치투쟁’으로부터 뼈저린 변화의 노력으로 거듭나라는 주문을 일반화 시켰다. 그것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지역의 공감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부안, 전주, 원주를 다니며, 그 곳의 사람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한국사회의 그늘이 관통하는 지역의 변화는 한국사회 변화의 내용을 담보한다. 그래서 강준만은 “한국을 지방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 지역에서 변화를 준비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기획이 되어야 한다. 이념과 입장에 따라 나눠지고 합쳐지는 방식이 아니라, 구분된 이념과 입장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자치, 평화, 생태와 같은 가치의 총체로서 ‘지역’안에 진보가 구현되게 하고, 또한 그런 지역들의 네트워트가 서울의 일방주의를 포위하는 형태의 새로운 진보기획이 구상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사회에서 ‘지역’은 그 자체로 진보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고유기 사무처장이 쓴 것으로 인권연대가 발행하는 웹진 '사람소리'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