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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 운명론의 대한 논란

    2006-06-25 13:13:38
  • 작성자하얀마음 () 조회수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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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 운명론의 대한 논란

    운명을 믿는 신앙이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시대에 걸쳐, 인간은 삶의 신비를
    벗겨 내고 진행되는 사건들에
    어떤 목적이 담겨 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신’이니 ‘운명’이니
    ‘우연’이니 하는 개념들을 도입하게 되는데,
    어떤 개념이 도입되느냐 하는 것은 그러한
    사건들이 인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힘에서
    비롯되었는지, 인격적인 특성과는 무관한 질서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완전히 무질서한 근원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달려 있다”고,
    역사가 엘메르 랭그랑은 설명합니다.

    역사는 운명이나 숙명과 관련된 신앙과
    전설과 신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시리아 학자인 장 보테로는 “우리 문화의 모든 부면은
    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말하면서,
    “인류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진
    반응을 나타내며 생각을 한 흔적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

    즉 확인 가능한 종교적 사상 체계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다고 부언합니다. 운명론의 기원을 발견하게 되는
    곳도 바로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바빌로니아입니다.

    고대 운명론의 근원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폐허 가운데서,
    고고학자들은 인류에게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기록물 가운데 일부를 발견하였습니다.

    설형 문자로 기록된 그 수많은 점토판들은
    고대 수메르 문명과 아카드 문명의 생활상 및
    유명한 도시 바빌론의 생활상을 아주 생생하게 알려 줍니다.

    고고학자 새뮤얼 N. 크레이머의 말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이 겪는 고통이라고 하는
    문제로 인해, 특히 수수께끼와도 같은
    그 고통의 원인 때문에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운명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내게 되었습니다.

    고고학자 조앤 오우츠는 자신의 저서
    「바빌론」(Babylon)에서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는 각자 자기만의
    신이나 여신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신들이
    “인류 개개인과 전체의 운명을 정해 놓는다”고 믿었습니다.

    크레이머의 말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은
    “우주를 관장하는 신들이 악과 거짓과 폭력을
    문명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계획하여 정해 놓았다”고 믿었습니다.

    운명을 믿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높이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점술 즉
    “신들과 교신하는 기술”을 통해 신들의 계획을
    알아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점술은 사물과 사건들을 관찰하여 그 의미를 깨닫고
    해석함으로 미래를 예언하려는 시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꿈, 동물의 행동, 내장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미래를 알려 준다고 여겨진 뜻밖의 사건이나
    특이한 일들은 점토판에 기록하였습니다.

    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프랑스 학자
    에두아르 도름의 말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끝없이
    계속 거슬러올라가 보아도,
    점쟁이와 점술에 관한 사상이
    존재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점술은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보테로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조사와 점술을 통한 추론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
    물질적 우주 전체가, 주의 깊이 연구하면 어떤 방법으로인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 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수단으로 점성술을 열렬히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주사위를 던지거나
    제비를 뽑아 점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데버러 베넷은 자신의 저서 「무작위」(Randomness)에서,
    그러한 물건을 사용한 목적은

    “인간이 조작할 가능성을 배제함으로 신들에게
    자기 뜻을 표현할 확실한 통로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신들의 결정이 절대 불변이라고 여겨진 것은 아닙니다.
    신들에게 간청하면 나쁜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운명론

    기원전 15세기에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이에
    광범위한 접촉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교류된 문화 가운데는 운명과
    관련된 종교 관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운명을 믿는 신앙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옥스퍼드 대학교의 이집트학
    교수인 존 R. 베이니스의 말에 따르면,

    “관련된 [이집트] 종교의 상당수가 예측 불가능한 일과
    불운한 일을 미리 간파하여 그에 대처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많은 이집트 신들 가운데 이시스는 “생명의 주인,
    운명과 숙명의 지배자”로 일컬어졌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또한 점술과 점성술을 행하였습니다.

    한 역사가는
    “신들에게 묻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면에서
    그들이 발휘한 창의성에는 한계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빌론에서 운명론을 도입한 문명은
    이집트 문명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운명론

    종교 문제에 관한 한, “고대 그리스는 바빌로니아의
    광범위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장 보테로는 지적합니다. 피터 그린 교수는 그리스에서
    운명을 믿는 신앙이 그토록 인기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대해 책임지기를
    점점 싫어하고,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알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운명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느낄 때가
    매우 많은 이 불안정한 세상에서, 신탁을 통해
    신의 명령을 받는 것[신이 결정해 준 운명을 아는 것]은

    개인의 미래를 상세히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특별한 기술이나 통찰력만 있으면, 운명이 결정해
    놓은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미리 경고를
    받으면 적어도 대비는 할 수 있었다.”

    운명을 믿는 신앙은 개인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것에 더해, 좀더 악의적인
    목적에도 이용되었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사상은 대중을 억압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역사가 F. H. 샌드백의 말에 따르면,
    그런 면에서 “세상이 전적으로 신의 섭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신앙은 지배 민족의 지배 계층에 호소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린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신앙은 “기존의 사회·정치 질서를 도덕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의미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정당화시켜 주었다.

    이것은 그때까지 그리스의 지배 계층이 고안해 낸,
    자기 지위를 영속시키기 위한 수단 가운데
    가장 강력하면서도 교활한 수단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가,
    그 일은 어차피 일어날 운명이었다는 의미가 되어 버렸다.

    자연의 힘은 인류에게 호의적인 성향이 있으므로,
    운명으로 결정지어진 것은 모두 최상의 유익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사실상
    “냉혹한 이기주의의 정당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운명론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리스 문학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대 문학의 장르 가운데는 서사시,
    전설, 비극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장르에서
    운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운명은 ‘모이라’라는
    세 여신으로 상징되었습니다.

    클로토는 생명의 실을 잣는 신이었고,
    라케시스는 수명을 결정했으며,
    아트로포스는 할당된 시간이 다 차면
    생명을 끊는 일을 하였습니다.
    로마인들에게도 ‘파르카이’라고 하는
    유사한 삼신(三神)이 있었습니다.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의 운명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몹시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빌론에서 점성술과 점술을
    도입하여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로마인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사용되는
    사건들을 포르텐타 즉 징조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징조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오미나라고 불렀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에서는 점성술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62년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알려진 점성도(占星圖)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점성술에 어찌나 관심이 많았던지,
    길버트 머레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점성술로 인해
    “그리스인들의 정신이 받은 영향은 마치 어떤
    외딴 섬에 사는 사람들이 신종 질병에
    걸린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
    신탁 제사장이나 영매를 많이 찾아갔습니다.
    신들은 이들을 통해 사람들과 교신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희망 대신 두려움이 자리를 잡았다. 삶의 목적은
    어떤 실제적인 선(善)을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불운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주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운명 사상이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문화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위 교부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술물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그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한 가지 문제는,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과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46:10; 요한 첫째 4:8)

    만일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끝을 알고 계셨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이라는 점과
    그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점도
    미리 알고 계셨을 것이라고 그들은 추리하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글을 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오리게네스는,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자유 의지라는 개념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우 명백하게 밝혀 주는 구절이 수없이 많이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썼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외부에서
    가해진 어떤 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일일 뿐 아니라 이치에 맞지도 않으며
    자유 의지 개념을 말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께서 어떤 사건이 어떤 순서로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아실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그러한 사건을 일어나게
    하신다거나 그러한 사건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오리게네스의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영향력 있는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
    (기원 354-430년)는, 자유 의지가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데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함으로
    논의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설이 그리스도교국 내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의 저술물들, 특히 「자유 의지에 관하여」
    (De libero arbitrio)는 중세에 있었던
    논의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논쟁은 결국 종교 개혁이 일어나
    예정설 문제로 인해 그리스도교국이 심하게
    분열되면서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에 대한 사상은 결코
    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슬람교도들은 재난이 닥칠 때
    “메크투브” 즉 ‘그렇게 되도록 쓰여 있다’고
    말함으로 운명을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동양의 많은 종교들에서는 개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종교들의
    가르침에도 운명론적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란 전생의 행동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가리킵니다.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 된 기록물은
    거북의 등딱지에 새겨진 글로서,
    점을 칠 때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운명론은 또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신앙의 일부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아스텍족은 개인의 운명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점술용 달력을 고안하였습니다.
    운명론적인 신앙은 아프리카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운명이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에게는 탁월한 힘을 가진 존재를 믿어야 할
    근본적인 필요가 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존 B. 노스는 자신의 저서 「인간의 종교」
    (Man’s Religions)에서 이렇게 인정합니다.

    “모든 종교는 방식이 다를지는 몰라도,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럴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외부에 있는 자연과 사회의 여러가지 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힘에
    의존하기까지 한다. 어렴풋하게든 분명하게든,
    인간은 자신이 세상과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과 그분이 우리의 운명을 절대 바꿀 수 없도록
    정해 놓으신다고 믿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어떤 역할을 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