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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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그냥 내버려둬도 됩니다"


  • - '끝나버린 새만금'에 희망을 놓치 않는 갯벌 배움터 '그레' 주민과의
    만남







    소록도 → 구례 (여순사건 위령탑준공식 현장) → 광주(학살현장 및 5.18 묘역)
    → 실상사(지리산 생명연대) → 지리산 계곡 → 지리산 국립공원과 섬진강 일대→ 전북 고창(생명평화탁발순례) →
    전북 부안 새만금 (계화도 ‘그레’와의
    만남)





    비틀스의 'Let's It Be'라는 노래를 기억할 거다.
    그 노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고난에 처했을때, 어머니는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냥 그대로 둬라”


    새만금 개발의 현장인 전북 부안군 계화도 주민들은 새만금 개발문제를 놓고 “그냥 내버려 달라”고 한다. 체념의 말이 아니다. 새만금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될 수록 그에 따른 새로운 ‘재앙’이 시작될 것이다. 결국 새만금의 갯벌은 또 다른 재앙으로 인해
    그 생명을 부활시킬 수밖에 없는 역설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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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조제로 바다와 격리된 새만금 갯벌은 비가 오면 더욱 빠른 속도로
    생명을 잃어간다.
     
    그렇다고 그들이 ‘재앙’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방조제를 터라”라고 요구하고 있다. 새만금 개발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일부 방조제를 터서라도 해수유통을 통해 갯벌의
    생명력만큼은 이어가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황사와 같은 염분피해와 새만금과 인접한 동진강, 만경강의 범람으로 인한 재앙이 닥칠 수 밖에
    없다.


    # 새만금 개발의 정당성, 여전히 인정 못받아


    새만금은 이미 끝난 역사처럼 보였다. 대법원은 지난 3월19일 2001년부터 이어져 온 새만금 개발추진에 따른 소송의 최종 판결을 내렸다.
    결론은 간척사업을 추진하는 농림부의 승리였다. 하지만 법원이 새만금 간척사업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새만금 개발은 이미 15년전인 1991년도11월 29일부터 시작됐다. 이는 1987년 당시 민정당 대선후보였던 노태우가 전북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한 유세과정에서 당시 팽배해 있던 군사정권에 대한 불신의 타개책으로 "호남평야의 풍요로움처럼 새만금 갯벌을 막아 새로운 부를 창출하자"며
    즉흥적으로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사실 ‘새 만금(萬金)’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노태우는 서해안 갯벌의 대규모 매립을 개발로 인한 ‘새로운
    풍요’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새만금 개발은 앞서 노태우의 즉흥적 아이디어라는 면에서그 출발부터 철저히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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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갯벌이 죽어가면서 이제 맨발로 걷는 일도
    어려워졌다.
     
    새만금 개발이 한국사회의 큰 현안으로 등장한
    때는 이미 방조제 사업이 90% 진행된 상태였다. 지난 3월의 대법원 판결은 때문에 이미 오래된 경과와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투입 등에 대한
    돌이킴의 부담과, 한편으로 반대여론에 대한 어물쩡한 면피책의 일환으로 해석되고 있다.


    # 죽어가는 새만금


    “그 조개가 우리들 다 먹여살리고, 새끼들 다키워 줬는데...”


    “우리나라 실업자들 새만금으로 다 보내라 ! 다 먹여살려, 그래서 새만금 개발은 대한민국 국민이 다같이 국민이 다 같이 막아야 해”


    “어민이 살아야 전라북도도 살고, 나라 정의도 사는 겁니다”


    새만금 판결이 이뤄지던 날 법정 현장에서 벌어진 주민들의 한결 같은 반응이다.
    실제로 새만금으로 일컬어지는 서해안 갯벌은 주민들에게는
    그야말로 ‘황금의 대지’다.
    서울 여의도의 140배로 1억 2천만평에 이르는 새만금 갯벌은 김제, 군산, 부안 등 전북 일대를 아우르며 이
    일대 주민들에게 귀중한 소득원이었다. 반농 반어촌이 대부분인 이들 지역의 주민들은 농사를 지어도 농번기가 끝나면 갯벌에 나가 조개를 잡아
    생활하였다. 농사일로 인한 소득이 저축원이라면 조개잡이는 일상생활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어느 부지런한 부부는 조개잡이 만으로 1년에
    4천여만원의 소득을 올리기도 했단다. 지금도 살아있는 갯벌에서 실뱀장어 1kg만 잡으면 6백만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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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순례단 참가자 중 한 명이 드러난 조개껍질에 발을 베었다. 갯벌이
    죽어가고 있다는 징표였다.
     
    그러나 그 새만금이 죽어가고
    있다.
    평화순례단에 참가한 한 학생은 이 날 갯벌체험에 맨발로 나섰다가 죽은 조개의 껍질에 발을 베이는 아픔을 겪었다. 이 상황을 보면서
    필자는 4년전 똑같이 맨발 갯벌체험에 나섰던 기억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갯벌체험은 이제 9살이 된 딸 아이에게 ‘풍성의 기억’으로
    떠올려진다.


    이 지역 주민인 김성배씨도 불과 3년 전만 해도 갯벌에서 발을 다치는 일은 일은 없었다고 한다. 전에는 ‘뻘’이 숨을 쉬면서 맨발로 갯벌을
    돌아다녀도 조개가 뻘 속으로 들어가버려 발을 베일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땅 바닥에 유리밟는 식’이 돼 버렸다.


    여기에 3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새만금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가 지난 4월에 끝이 나면서 벌써부터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일어난 변화는 군산지역 4공구 지역에서 였다. 방조제의 건설에 따라 바다의 유통이 막히면서 물이 안들어오고 갯벌에 산소 공급이
    차단되면서 생물서식이 눈의 띄게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끝물막이 공사 이전의 일이지만 이곳  계화도와 똑같은 ‘맛’을 잡아 생활하던 그
    지역 ‘내초도’ 마을은 이 결과로 이미 대부분의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도시의 노동자로 전락하였으며, 특히 여자들은 쓰레기 하치장에서 일당 2만
    5천원짜리 일에 종사하고 있다.


    이 곳 계화도도 4월 20일 끝물막이 공사 후 15일 만에 내린 비로 갯벌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합 등 많은 조개와 같은 갯벌
    생물들이 죽은 채 밖으로 드러난 게 확인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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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만금 개발의 역사를 들려주는 염종우씨. 그를 포함한 주민들의 요구는
    것은 '보상'이 아니다. 그냥 갯벌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갯벌이 사라지면서 죽은 것은 갯벌의 생명만이
    아니다.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 온 마을 공동체 또한 죽어가는 것이었다. 새만금 개발을 다룬 한 비디오물은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갯벌은 경계가 없다. 니것도 내것도 아닌, 소유하고 나눔의 공간이다.
    욕심을 다 채우기에 하루 서너시간 작업이면 충분하다
    갯벌의
    생명력은 인간의 삶을 보듬어 왔다., 그렇지만 인간만의 전유물은 또한 아니었다.
    호주에서 시베리아 이동하는 도요새에게도 새만금 갯벌은
    소중한 곳이다.
    어민들의 갯벌 작업모습은 그 도요새들과도 닮아 있다. 같은 부모아래 형제가 닮듯이.


    짠 바닷물을 금으로 만드는 게 바로 갯벌이다.
    그리고 그 갯벌은 우리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었다.


    그러나 새만금 개발이 시작되었다.
    새만금 개발은 갯벌과 사람과 도요새들에게 모든 생명에게
    날카로운 창이고 날카로운 칼
    끝이었다.


    # 희망은 남아 있다


    새만금에 그래도 희망은 남아 있다.
    처절함과 허탈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서 희망이 아니다.


    2006년 새만금 방조제가 막히던 날 시화호는 열리고 있었다.
    죽음의 호수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해수 유통’이라는
    ‘자연의 치유’를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의 호수‘로 익히 알려진 시화호도 새만금과 동일한 목적과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시화호는 지난 1995년 방조제 완공후 1년도 안지난 후 부터 바다가 검게 썩어들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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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민들의 황금의 대지요, 우리국토의 허파인 새만금 개발, 과연 이대로
    죽어갈 것인가!
     
    새만금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방조제
    일부를 터주기만 해도 해수유통이 가능해 갯벌의 자기 얼굴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
    ‘새만금의 귀신’이라 불리는 염종우씨는 26년 전에 이 곳을 터전으로 살아온 새만금 개발의  산 증인이다. 그러나
    전라북도 당국이나 정부는 방조제를 트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그들이 내놓는 대안은 갑문 설치에 따른 인위적 조절이다. 그러나 염씨에
    의하면 오히려 갑문 방식이야말로 불가능하다. 방조제로 둘러싸인 새만금 갯벌은 비가 200mm만 내려도 이 일대 마을을 침수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것을 하루 열려면 최소 1,500만원의 자가발전 비용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는 결국 갑문 만들며 돈
    들이면서 오히려 그것의 목적을 이룰 수는 없는 매우 ‘우매한 짓’이다. 갑문 개방 방식은 생명유지개념에 결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염씨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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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례 참가자들이 갯벌에 나가 방조제 공사 이후의 갯벌을 체험하고
    있다.
     
    때문에 주민들에게 있어 유일한 대안은
    ‘방조제를 터라’는 것이다.
    이미 수년전부터 새만금 공사 영향을 연구해 온 국토연구원의 연구결과도 ‘심각한 환경재앙 초러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 6월 중 발표예정이라고 했으나 그것 마저 미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있어서 새만금의 문제해결방법은 ‘그냥 내버려 두라’이다.
    사실 갯벌을 터전으로 해온 주민들만큼 갯벌의 상태와 원리를
    제대로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새만금이 이미 끝났다고 얘기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 ‘그레’,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


    이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레’이다
    ‘그레’는 삼각형 틀로 된 백합조개잡이의 도구이다. 주민들의 그레질은 주민들의
    조개잡이 수단이기도 하지만, 갯벌 안쪽에 산소와 물, 햇빛을 공급해 주는 자극이 돼 갯벌이 주민들의 귀한 생업으로 다시 되돌려도록 하는 갯벌의
    유지관리 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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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만금의 새로운 희망을 만들기 시작한 갯벌 배움터 '그레'모습.
    이전에는 김 양식공장이었던 건물이다.
     
    이 그레를 이름으로 한 이 단체에 털털한
    동네의 청년들이 모여 있다. 염종우 씨, 아버지의 고향이 제주라는 고은식씨, 김성배씨 등이 그들이다. 그들의 관계는 ‘사오정’으로 불린다. 서로
    새만금 갯벌을 살리는데 방법론이 다른데서 그들 스스로 붙려진 관계명이다. 하지만 일을 할때는 뜻이 모인단다.


    그레는 ‘갯벌 배움터’를 자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일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새만금의 문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나누는
    것’이다.
    그 하나는 잘못된 국책사업이 2만여명이 넘는 생존권을 억압하는 것을 알린다.
    또한 국토확장 명분의 국책사업이 사실은
    생명파괴라는 점에서, 국토개념으로서의 갯벌을  정부가 오히려 앞장서 파괴하는 잘못된 악순환을 바로잡으려 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부안사람들’이라는 단체가 확대발전해 형성된 ‘그레’ 공간에는 오늘도 동네 청년들이 모여 새만금 살리기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염려하며 찾아간 우리들에게 또 다시 말한다.


    “우리, 그냥 내버려둬도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새만금 갯벌은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의 개발현장에서 생명평화의 논리를 앵글로
    담고 싶습니다”

    - 새만금 개발의 역사와 이면을 앵글에 담는 다큐멘터리 감독
    이재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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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수 감독은 4년전부터 새만금 문제를 조명하기위한
    다큐멘터리 작업에 매진 중이다. 그는 동네 분들과 이미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평화순례단이 계화도를 찾았을때
    같은 시간에 ‘씨네 21’의 기자들도 와 있었다. 이미 4년전부터 새만금의 실상을 다큐멘터리로 엮기 시작한 이재수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7월 1일자 ‘씨네 21’ 보도 예정)

    이재수 감독에게 새만금의 유일한 희망은 ‘주민’이다. 새만금 문제가 첨예하게 불거질때 ‘바다도시’와 같은 대안론이 등장했었다.
    즉, 간척사업은 돌이키기 힘드니 대신 바다도시를 만들어 갯벌과 더불어 대안을 찾자는 움직임이었다.


    이 때도 ‘그레’를 비롯한 주민들은 이를 비판했다. 갯벌생명의 시각에서 이는 합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타협이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그저 그대로의 ‘갯벌’을 돌려달라는 것인데도, 국내의 유명한 환경단체들 마저 사실상 이 ‘대안’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말았다는 것이 이감독의 지적이다. 그에게 있어 지금 환경운동의 진짜 위기는 개발현장의 소통자가 아닌 업무의 연속으로 이를 바라보려
    하는 데 조직이기주의에 있다고 본다.


    때문에 환경단체마저 생명평화를 화두로 이끌어 낸 사건으로서 새만금을 바로 보지 못하는 지금, 스스로 주민들의 파발마가 되기로
    자임했다. 그리고 벌써 4년이 지났다. 그리고 올 가을에 ‘새만금 이야기 (1) - 절망과 희망의 기로(가제)’라는 이름으로 그 첫
    편이 나올 예정이다.


    이 감독은 언젠가는 제주의 개발현장도 앵글에 담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제주는 이미 생명평화의 충돌현장으로서 알려지고
    있다는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