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감시·대안·참여·연대를 지향합니다.

  • 자위대에 저항하는 사람들

  •  아시아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한 일본, 그러나 군사기지에 시민의 저항이 가장 높은 나라도  일본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부분이 크다. 일본제국군대의 군국주의 깃발 아래 전개된 전쟁은 아시아민중 뿐만 아니라 일본 민중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한국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그러나 고통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키나와대학살과 도쿄대공습 등 일본전역에서
    수백만이 죽어갔다. 군인칙유, 전진훈 등의 무장한 일본군대에 의한 옥쇄를 비롯해 미군에 대해 끝까지 저항 아니면 죽음만이 존재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사촌 언저리만 가도 전쟁 때 피해자가 있다. 그래서 나이든 시민들 일수록 전쟁과 군대에 대해 거부 정서가 강하다.


     일본 전역에서 자위대를 감시하며 군대와 전쟁을 반대하는 풀뿌리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중 상징적 의미가 남다른 현안이
    있다. 바로 미래 일본 안보의 가장 큰 대칭으로 설정된 중국을 겨냥한 신기지건설을 반대하는 주민운동이다.
      

    미야코지마시(宮古島市) 이라부지마(伊良部島)의 시모지(下地)공항 자위대기지 건설반대 운동이다. 미야코지마시는 오키나와현의 남쪽에 위치한
    섬지역이다. 미야코섬과 이라부섬으로 구성된 미야코지마시는 한국이나 중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일본에서는 대표적인 여름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이라부섬은 바다가 특히 아름다워 스킨스쿠버 다이빙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는73년에 건설된 민항기전용 공항이 있다. 아름다운
    태평양을 바로 보는 남서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시모지공항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2000년 전후부터 일본정부가 는 자위대기지를
    추진하였다.


    민간기 전용 공항의 운용횟수가 줄어들면서 30억 정도로 적자가 늘어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1년 4월 이라부쵸의회가
    시모지공항에 자위대 훈련기지 유치를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방위청은 이러한 요청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 일뿐 내막은 정반대였다.
    실제로는 방위청의 큰 구도속에서 지역정치인들의 적극적으로 나서게끔 분위기를 유도한 것이다.더욱이 그해  5월 15일 미국국방성의
    싱크탱크집단인 랜드 연구소의 보고서 「미국과 아시아」에서 “시모지지마 등 오키나와의 공항시설을 군사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라고 밝혀져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5월 22일 오키나와 미국 총영사가 시모지공항을 시찰하기도 했다. 그해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오키나와 주둔하고 있던 미해병대의 헬기부대가  필리핀 합동 연습 출발과 귀환시에 시모지공항에 기착하여 급유를 받았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정황은 미야코지마시의 시민단체들 사이에서 자위대기지를 넘어  미군기지를 조성하려는 장기적인 포석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 3년간 이 문제가 수면에 내려앉는 듯했다. 하지만 방위청은 나름대로 물밑에서 계속검토를 했고 지역주민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며
    교원노조, 시민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토론회, 반대서명 등을 조직해 나갔다. 그러다가 2005년  3월 16일 이라부쵸 의회에서
    시모지공항의 자위대 유치를 찬성 9 반대 8으로 결의하였다. 그날 밤 주민들은 자위대 기지 설명회 자리에 3000명 이상이 모여 자위대기지의
    유치에 대해 강한 반대 의견을 드러내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자위대 기지를 유치하기로 생각했던 의원들은 이런 반발에 당황했다. 급기야
    미군기지와 자위대의 공동사용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미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위대가 들어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대답해
    주민들의 실소를 자아내기 까지 했다. 3시간 넘는 주민 설명회의 마지막에 결국 의원들은 주민들의 강한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3월 25일 최종적으로 이라부쵸 임시의회에서 16일의 자위대기지 유치 결의와 2001년 자위대 훈련 유치 결의의 백지 철회를 찬성
    16 반대 1 으로 결의하며 자위대 유치기도를 무산시켰다. 당시 주민들을 이끌었던 시모지공항자위대기지건설반대위원회 위원장인 후쿠시마 마사하루
    위원장은 “주민들의 민의가 제일 중요하다. 자위대기지가 들어오면 지역개발과 경제적 번영 등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지역번영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유치 찬성에 나선 이라부쵸의원들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 이제는 주민들의 확고한 입장이 드러났기
    때문에 일본정부가 추진하더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작년 10월
    1일 이라부쵸가 주변의 다른 흩어져 있던 기초지자체 등과 합병하여 미야코지마시가 되었다. 공항으로 인한 적자를 자위대 유치로 인해 풀어가는 것이
    아닌 다른 시, 마을과 합병을 통해 해결점을 찾기 위함이다. 그 결과 이라부쵸의회의 자위대기지 유치기도는 물거품으로 끝났다. 현재 미야코지마시는
    아키라 이시미네 시장이하 시청전체가 자위대 기지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아키라이시미네시장은 “자위대기지는 분명히 반대한다. 그런 시설이 우리
    지역에 들어와야 할 이유가 없다. 평화로운 이곳에 왜 군사시설이 들어와야 하는가. 오키나와는 이미 군사시설로 고통 받을 만큼 받았다.
    미야코지마시청과 시민들이 함께 뭉쳐 중앙정부와 방위청의 계획을 막아낼 것이다. 보조금등 돈다발을 들고 회유하거나 유혹을 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 평화는 더욱 소중한 가치다.”라며 강하게 자위대기지 건설을 반대했다. 일본 지자체의 내공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전쟁을 겪고 자위대가 헌법에 의해 교전권이 금지된 상황이기 때문에 아무리 중앙정부가 강력히 추진해도 지자체와 지역주민의 동의를 얻어
    내지 못하면 기지건설은 꿈도 못 꾼다. 이런 것이 진정한 지자체의 참모습이다.


    지난 2월 항공자위대 나하기지 사령관이 “일본의 방위상, 시모지지마를 자위대를 이용해야 한다.”라고 밝혀 다시 파문이 일었다. 방위청과
    항공자위대는 시모지공항의 자위대기지건설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방위전략의 무게중심이 급격히 대중국견제로 옮겨지면서 중국을 향한
    전진기지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일본정부의 의도와 계획에 상관없이 미야코지마시청과 시민들은 무력이 아닌 또 다른 방법의
    전략을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중국과의 원활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도쿄에서도 자위대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울려 퍼지고 있다. 다치가와감시텐트의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다치가와 기지는 도쿄의 서쪽 다치가와시(立川市)에 자리잡고 있다. 육상자위대가 중심인데 기지의 역할은 수도 도쿄의 주변의 보호, 바로 옆에 있는
    요코타 미군기지의 보호다. 지금도 국가 비상시에 대비하여 가스미가세키(일본 국회의사당, 외무성등 국가주요 기관이 모인 지역)의 비상대피건물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다치가와 자위대기지는 구일본군 때부터 군사기지가 있던 곳이다. 태평양전쟁말기에는 군수산업시설인 다치가와 비행장에서는 전투기 등 많은
    비행기를 생산되었다. 전쟁 후가 미군이 주둔한 이후 1950년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곳은 전초 기지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기지의
    확장 때문에 스나가와 지역일대가 그 안으로 편입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들리자 스나가와 투쟁이 일어났다. 일본의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주민운동이자
    미군기지 투쟁인 스나가와 투쟁은 바로 이 다치가와 기지로 인해 시작되었다. 투쟁에 가담했던 사람들 대부분 비행장 활주로 연장지역에 농사를 짓고
    있던 농민들이었고, 미군기지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는 물론 학생들까지 이 투쟁에 뛰어 들었다. 55년부터 57년까지 투쟁은 계속되었고 68년,
    마침내 일본 정부는 스나가와 지역에 활주로 연장하는 사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이후 이곳의 미군기지는 근방의 요코타 미 공군기지로 옮겨졌다.
    기지가 옮겨가기 전 72년에 미리 이곳에 자위대가 들어와 기지 이전되었던 77년까지, 5년 동안 자위대와 미군이 이곳에서 공동 훈련을 했다.


    다치가와 자위대 기지 감시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다치가와 감시 텐트 촌’의 대표인 카토 카츠코 (加藤和子, 70) 씨는 지난 72년 당시
    미군기지였던 다치가와에 자위대의 주둔을 반대하는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곳으로 와 감시 텐트 마을 결성에 참가했다. 그 이후 다치가와 감시 텐트
    마을 활동은 2003년으로 30주년을 맞았다. 그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다치가와 기지 앞에서 데모와 반전 방송을 하고 있다. 82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시위를 조직했다.


    카토카츠코씨는 다치가와기지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제일 문제라고 느끼고 있는 점은 헬기의 소음이다. 그리고 추락의 위험이다. 지금 한 달에
    두 번 자위대의 수송기 착륙을 하는데,   착륙거리라고 짧아 매우 위험하다. 다른 기지에서는 대부분 1600미터 정도의 착륙을
    하는데, 이곳의 활주로는 1000미터밖에 안 된다.  그런 위험한 비행이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다는데 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15일, 정부의 불법 가택 수색과 고등법원의 유죄판결에 반대하는 ‘재판 무죄 판결 대행진’이 다치가와 에키키구에서 열렸다.
    다치가와 텐트 마을 운동협회의 가토 가츠코 씨는 다치가와 육상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을 시작한 이후 정부 측의 탄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2004년 2월, 다치가와 자위대 관사에 이라크 파병 반대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나눠준 것을 이유로 다치가와 텐트 마을 회원 3명과
    카토 카츠코 선생의 집이 경찰의 가택 수색을 받았다. 2004년 12월 1심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작년 12월 동경 고등재판소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번 11월 22일에 최고재판소에서 마지막 판결결과가 나온다. 카토 카츠코 씨는 “ 다치가와에서 이라크에 파견한 대원도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이 항상 반대를 하고 있지만, 파견된 대원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는 상태이다, 반대 운동이 없어지면, 평화롭게 여기서
    살 수 없다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자위대가 일본 전역에 주둔하고 있듯이 지역주민들의 자위대에 기지에 대한 감시와 저항 운동 또한 폭넓게 펼쳐지고 있다. 자위대의 기지와
    훈련에 대해서 가장 깊고 넓게 대응하는 곳은 훗카이도였다. 지역주민, 목회자, 평화단체 등이 자연스런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단체로인 홋카이도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기지의 상황과 흐름을 시기별로 꼼꼼히 모니터링하면서 각각의 현안에 대해서 대응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기지의 이동과 이전, 배치 등의 기본적인 사항을 비롯하여 새로운 무기체계와 장비의 도입 등을 감시하는 활동이다. 홋카이도의
    자위대를 감시하는 활동은 일본 전체의 평화운동에서도 군사 활동과 기지를 감시하는 활동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이런 활동은 아츠기의 소음소중을
    비롯한 기지감시운동과 요코스카의 해상에서 기지를 감시하는 요코스카평화선단 등 여러 형태의 평화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 모두는 군대로
    공식화되려는 자위대의 합법화를 막고 평화의 주춧돌을 놓는 활동들이다.  


    일본자위대는 동북아의 미래를 결정짓는 변수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각지에서 전개되는 자위대에 대한 감시와 저항운동은 일본을
    넘어선 동북아의 평화운동이다. 그래서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연대하고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군비경쟁을 넘어 자위대의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씨앗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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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평화운동의 전설
    시보쿠사(忍草)어머니회


    관동지역 기타후지(北富士)연습장은 일본평화운동의 전설적인 투쟁 현장이었다. 일본의 상징으로 불리는 후지산의 북쪽자락에서
    시작되었다. 야마나시현(山利県) 미나미츠루군(南都留郡) 오시노무라(忍野村) 시보쿠사(忍草)마을이다. 50년대 말부터 일본정부는 후지산
    북쪽 자락을 자위대연습장으로 조성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시보쿠사 주민들의 투쟁이 바로 시보쿠사 어머니회의 투쟁이었다.
    키타후지연습장은 현재 관동지역에서 육상자위대가 관리하고 있는 최대 규모의 훈련장 중의 하나다. 이곳은 과거 구일본시절부터 군사용지로
    사용하다가 일본의 패전 후 미군훈련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주도하여 한국의 군인들인 데리고 와서 북한에 있는
    것과 흡사한 마을을 조성하여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일본 정부의 키타후지연습장 확장 강행에 맞서 1960년의 안보 투쟁의
    열기 속에 농민들의 농지지키기 조합인 시보쿠사어머니의 회를 결성했다. 수백 년 농사짓던 땅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수용하려는 데에 대한
    반발로 투쟁이 촉발되었다. 그런데 어머니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선 이유는 남편들이 잡혀가면 생계수단인 농사를 지을 사람들이 사려져
    아이들을 비롯한 가정의 존립이 어려워진다는 판단에 어머니들이 직접 투쟁조직을 결성했다. 이후 지난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65년 리틀
    존을 실력으로 저지하고 작은 승리를 거둔 것을 비롯해  67년 8월부터 70년 10월까지 3년 3개월 동안 키타후지 연습장의
    한가운데에 농지지키기 망루거점을 건설하고 연좌 농성에 들어가 베트남 전쟁을 위한 미군과·자위대의 실탄 연습을 완전 중지시키기도 했다.


    미군은 70년 7월 1일부터의 해병대 실탄 연습의 재개를 통고해 왔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시보쿠사어머니들을 비롯한 농민들은
    실탄연습을 실력으로 저지하자는 궐기에 나서서 경시청 기동대를 돌파한 후 미군과 격돌하여 해 연습을 완전 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70년 10월 27일 일본정부는 천명의 기동대를 동원해 어머니회의 농성장을 폭력적으로 철거하면서 7년 동안 경찰력을 동원하여 다양한
    탄압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어머니들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72년 3월부터 83년 8월까지 11년 5개월에 걸쳐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좌 농성을 하기도 했다. 70년대 일본 평화운동의 역사를 써간 투쟁이었다. 이제 투쟁의 당사들인 어머니들이
    80대가 넘는 할머니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키타후지연습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자위대의 전쟁연습에 대해 지속적으로 캠페인과
    저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라크파병에 투입된 자위대의 야전연습을 저지하는 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시복쿠사어머니회의
    40년이 넘는 이런 활동은 일본을 넘어 아시아에서 유례가 드문 평화운동이었다. 일본 평화운동의 저력을 보여주는 한줄기가 맥이 바로
    시보쿠사어머니들이 보여준 군사주의를 반대하고 농민들의 땅을 지켜나가는 활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