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9월의 휴먼라이브러리] 제주를 지키는 또 다른 얼굴 강.정.효
그러므로 강정효가... 곧 '제주'다.
▲ 강정효 작가의 서재, 그리고 제주도.
"나에게 제주도는 OOO이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님에게 제주도나 한라산은 한마디로 어떤 의미인가요?' 확 정리해서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강정효 작가님과 쭉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작가님의 인생이 오롯이 제주도였고, 한라산이였고, 백록담이었으니까요.
거기에 돌담도 있고, 동자석도 있고, 오름과 바당도 있었습니다.
그냥 '강정효'가 '제주'였습니다.
그 외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던,
제주도에 대한 애정과 기록을 놓치지 않은 성실함으로
제주도를 묵묵히 지키는 1만 5천 '신'의 반열에 오른 그 사나이..
강정효 작가님을 만나러 가 보실까요?
- 일 시 : 2015년 9일 17일 오후 3시
- 장 소 : 광령에 위치한 강정효 사진공방 '이소재(離騷齋)'
- 함께한 이들 : 김영숙, 김홍구, 문미희 회원님 (처음뵙는 문미희 회원님, 반가웠습니다. ^^)
- 기 획 : 김미정 시민사업국장
- 글 / 사진 : 박유라 간사
- 2009년 2월에 작업실을 열고 이름을 이소재(離騷齋)라고 지으셨습니다. 이름을 왜 '이소재'인가요?
- 작업실을 짓고 이사를 와서 앉아 있는데, 집 안에서 새소리가 나는 거예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주방위 싱크대 후드에 새가 둥지를 틀었더라고요. 연통을 통해 들어온 모양이에요. 그래서 결국 새가 둥지에서 떠날때까지 가스렌지를 쓰지 못했지요. 새가 둥지에서 나가자마자 연통을 교체하고 입구를 막았어요. 우리 옛 말에 '새들이 둥지를 떠나다'라는 걸 '이소'라고 하였습니다. 뜻은 굴원의 시 '이소(離騷)'에서 따왔습니다. 이별할 '이'에 시끄러울 '소'.
- 새가 후드에 둥지를 틀다니.. 불편하셨겠지만, 꽤 낭만적이네요.
- 싱크대 후드에 새가 날아가니, 또 보일러가 되지 않는겁니다. 거기도 확인해보니, 연통에 둥지를 틀었더라고요. 연통이 막혀서 보일러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덕분에 3만원을 들여 연통을 교체하고, 철사로 막았어요. 사실 새가 들어오면 소리듣는 자체는 좋은데, 음식은 해먹어야 하니까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었지요. 그래도 덕분에 이 공간의 이름이 생겼습니다. 짓자마자 새가 둥지를 틀어서 이름을 짓게 되었으니까요.
- 이소재가 위치한 광령, 한라산도 잘 보이고 너무나도 좋은 곳이네요.
- 작업장소를 물색해 다닌 지 6개월 만에 만난 곳이에요. 제가 작업공간을 마련할 때 고려한 조건은 단 하나였습니다. '한라산이 잘 보이는 곳'. 근데 한라산이 잘 보이는 멋진 곳은 땅이 안 나오고, 땅이 나온 곳은 한라산이 보이지 않더군요. 고민고민하고 하고 있던 날, 제가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 사람들끼리 저녁을 먹는 모임이 있었어요. 거기서 어떤 분 친구가 부동산을 한다면서 도와준다고 하는 거예요. 좋은 데가 있다고... 처음 소개받고 간 곳은 지금 서부 경찰서 주변이었는데 다 좋았지만, 비행기가 딱 지나가는 겁니다. 아쉽지만 포기하고 다른 곳 보여준다고 해서 간 곳이 지금의 여기에요. 처음에는 이 땅이 나온 게 아니라 이 근처의 윗쪽 땅이 나와 있었어요. 근데 저는 딱 여기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마침 소개해 준 땅 주인이랑 이 곳 주인이 같다는 걸 알게 되었고, 부탁해서 여기에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참 '땅에는 다 주인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 강정효 사진작가와 문미희, 김영숙, 김홍구 회원
- 작가님은 제주도를 떠나서 살아본 적은 없으신가요?
- 저는 군대를 다녀온 27개월과, 매킨리봉 원정등반대원으로 참여한 시간을 제외하면 긴 시간 제주도를 떠나 지낸 적은 없어요. 그게 제주도를 떠난 시간의 전부입니다.
- 작가님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사진'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 제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잘 결정했다고 생각한 게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사진기자를 선택한 일이에요. 처음 제가 신문사에 입사를 했을 때는 글을 쓰는 취재기자로 합격했어요. 그런데 합격을 하고나서 취재말고 사진기자를 하겠다고 얘기했죠. 그러다보니 취재도 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기자가 되었습니다.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한 사람이 된거죠.
그렇게 30여 년 사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일을 오래하다보니,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이게 저에게 찾아온 두 번째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사진이든 어떠한 일이나 하나만 오래하게 되면 한 분야의 사람만 만나게 되고 사람이 자칫 편협해 질 수 있잖아요. 근데 글 쓰는 일도 하고, 사진도 하니 문학이나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다각적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 사진은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 사진은 고등학교 때 똑딱이 카메라를 접해본 게 처음이었어요. 대학에 입학해 학보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취재를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 마침 사진기자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누가 사진을 찍을 수 있냐고 묻더군요. 저는 고등학교 때 사진기를 만진 경험을 전부로 "제가 하겠다"라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저는 대학 강의를 나가면 학생들에게 꼭 이 경험을 강조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단지 몇 번 해봤다는 이유로 사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자기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다.'라고요.
저는 대학 강의를 나가면 학생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나는 단지 몇 번 해봤다는 이유로 사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자기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다'라고...
- '강정효'..라는 이름에는 따라붙는 수식어가 참 많은 거 같아요. 작가, 기자, 산악인...
- '산악인'이라는 수식어는 어느날 갑자기 갖게 되었어요. 기자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산악인들이 매킨리봉을 가는 프로젝트 준비를 2년 동안 해서 4명을 선발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과정 중에 신문사와 공동으로 주최하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회사에서 저에게 같이 갈 생각이 없냐고 묻더라고요. 주변에서는 다 반대했어요. 그 전까지 매킨리봉을 간 사람들이 많이 사고를 당하고 돌아왔거든요. 대학생 6명이 같이 갔다 3명이 죽고, 2명이 다친 일도 있었어요. 산악인 고상돈 이후 제대로 간 사람이 없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모두가 말렸어요. '네가 훈련이라도 했으면 보내겠는데, 안 된다....' 공항까지 나와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손금을 보여주며 "이거 봐라, 난 오래 살거니까 걱정마라"며 설득했지요. 그때가 32살때였습니다. 당시 전 아이가 6살, 3살이었어요. 같이가는 4명은 미혼이었고요. 근데 이상하게 집사람만은 반대를 하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매킨리 등반을 성공하고 돌아오니 산악인이 되어 있더라고요. 도착하자마자 산악회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매킨리에 오른 건 참 특별한 사건이었어요. 카퍼레이드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광양에서 탑동까지 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어요.
- 매킨리에 가는 건 한편으론 참 무모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떠셨나요?
- 훈련이 안된 상태에서 일단 장비만 당시 돈으로 500만원 어치를 샀어요. 등산화, 등산복을 사다보니 500만원이 들더라고요. 훈련이 안 되어 있으니, 갈 때 같이가는 사람들과 약속을 했어요. 가게 되면 텐트를 다섯 군데 치게 되는데, 저한테는 4캠프까지만 가라고 했지요. 결국 4캠프와 5캠프 중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매킨리 등반은 제 생각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어요. 4캠프까지 올라갔을 때, 나머지 4명은 정상으로 출발하고 저는 캠프에 남았어요. 캠프에서 기다리다보니 무전이 오더라고요. 정상에 왔는데, 정상표식을 못찾겠다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상에 알루미늄 같은 게 박혀 있다고 무전을 쳤어요. 그 후 2시간 동안 무전이 끊겨버린거예요. 버뜩 겁부터 나더라고요. 나 혼자 돌아가면 어떡하지.. 그 2시간 동안 오만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짧은 시간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다행이도 추워서 밧데리가 달아 무전이 되지 않았던 거였어요. 등반에 성공한 이후 산에서 내려와 기사를 계속 내보냈어요. 당시에는 컴퓨터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A4용지에 기사를 일일이 써서 팩스로 날렸지요. 그렇게 어느날 갑자기 산악인이라는 수식어를 갖게되고, 적십자 산악구조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많은 걸 느끼고 돌아온 사건이었습니다.
- '강정효 작가' 하면 '한라산'도 뺴 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 저는 한라산에 올라가다 힘들다고 돌아내려올 수 있는 사람들이 제일 부러워요. 내게 한라산은 '일'입니다. 취미나 운동이 아니죠. 지인들이 '한라산 많이 가 좋겠다'라고 말하면, '나는 일이다. 가기 싫어도 가야된다'라고 얘기해주죠. 기자 생활을 할 때는 신문사에서 퇴근하면 윗세오름으로 바로 갑니다. 가서 밥을 먹고, 내려와 출근하는 날들도 많았어요. 신문사에는 기획물이 많이 존재해요. 계속된 조사가 필요하죠. 11월 말 쯤이 되면 한라산 '첫눈' 사진이 꼭 필요했어요. 그때쯤 되면 잠을 제대로 못잤어요. 날만 추워져 첫눈이 내릴성 싶으면 새벽 4시에 한라산을 올라가는거죠. 언제는 7번 만에 첫눈 사진을 찍은 적도 있었어요. 6번은 허탕을 친 셈이죠. 한라산에 계속 오르니 청소아줌마도 알게 되고 하잖아요. 그럼 아주머니께 '눈이 올 것 같으면 연락을 달라'고 얘기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라산에 올라가다 힘들다고 돌아내려올 수 있는 사람들이 제일 부러워요.
내게 한라산은 '일'입니다.
- 이제 '한라산'하면, 강정효 이외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없다는 점은 좀 아쉽습니다.
- 누군가는 제게 '너는 나쁜놈이다. 기자 그만두면서 왜 후배를 안 키웠냐'고 타박하기도 합니다. 이제 사고가 나기 전엔 한라산에 가는 기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지금 한라산의 문제는 등산로가 아닌 곳에 사람들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한라산은 등산로 이외엔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요. 등산로를 벗어나면 범칙금 대상이 됩니다. 예전에는 길을 잃어버릴까자 겁나서 사람들이 한라산에 섣불리 들어가지 못했어요. 근데 요즘은 핸드폰으로 GPS가 되니 다들 아무데나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건 단속이 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죠. 현장에 직접 가서 보면 이런 문제가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런 현장에 직접 가 보는 기자가 거의 없어요. 특히나 사진기자는 자기가 현장에 직접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데 말이죠.
2006년에 백록담 분화구에 산사태가 난 적이 있었어요. 500m 이상 쓸려내려가버린 꽤 큰 산사태였습니다. 근데 그 어떤 기자도 현장에 가서 산사태 현장을 찾지 못했어요. 산사태 전에 분화구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전후사정을 아는 기자가 없었기 떄문이죠. 그래서 제가 예전 사진과 현재 산사태 사진을 붙여서 보여 주었죠. 그리고는 일이 커졌습니다. 서울에서 문화재 위원 10명이 내려와 조사에 들어갔죠. 자기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관점은 참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 그런 것 말고도, 제주도에 대해 기록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으셨겠어요.
- 저는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합니다. '제주엔 하천정비사업이라는 게 있다. 아마 바다에서 내 차를 끌고 하천따라 올라가면 한라산까지 갈 수 있을거다...'라고요.
실제로 하천정비사업을 한 곳은 이것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근데 이런 곳은 평탄화 작업을 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오히려 바위가 있어야 유속이 느려지고, 홍수나 재해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천평탄화사업을 해야 돈이 집행되는 행정의 현실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쉽습니다.
'거욱대'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90년대 후반쯤 전염병 같이 빈 곳만 생기면 거욱대를 세우고, 불턱과 원담을 복원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된 복원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요. 예전 모양이랑 너무 달랐습니다. 사실 거욱대 복원도 기존 원형의 거욱대를 다듬기만 해도 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정에서는 아예 허물어서 새로 만드는 복원을 선택하더라고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강의를 듣는 예비 공무원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관계된 사람들이니 제발 이렇게 하지 말아달라고요. 차라리 방치시켜서 내버리는게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공무원들은 집행과 비용만 생각하니 이런 일이 생길 수밖에요. 애월 도대굴만 해도 온전한 것을 아예 허물어버렸습니다. 난 뭐 딴짓하지 말고, 사진이나 열심히 찍어야지요. 기록으로 남으니...
- 얼마전 서울에서 「할로영산 바람웃도」 전시를 하셨습니다. 혹시 제주에서 다시 할 생각은 있으신가요?
- 아직 제주도에서 전시를 다시 할 계획은 없어요. 그래도 제안은 들어온 상태입니다. 「할로영산 바람웃도」 전시 전에 우연히 서귀포에서 현을생 시장을 만났어요. 시장이 '여기서(서귀포) 전시해야하는거 아니냐'고 제안을 하더군요. 내년이나 올해 12월쯤.. 아직 확정된 일정은 아닙니다만...
- 근데 왜 「할로영산 바람웃도」 전시를 제주도에서 하지 않고, 서울에서 하게 되었나요? 이유가 있나요?
- 일단 서울에서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 제주에서 했을 때 서울에서와 같은 반응이 나왔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있었어요. 서울만큼 반응이 안 나올 것이라 생각했죠. 제주도에서 책을 내거나 전시를 하면, 저의 지인들을 포함해 저를 아는 분들이 많다보니 전시나 책의 '내용'을 보기보다, 그냥 '강정효가 전시를 하는구나.. 책을 내는구나..'에서 끝나 버릴 수 있거든요.
- 그래도 서울에서 전시를 하거나 책을 내면 제주를 알리는 기회도 될 수 있어 좋은 거 같아요.
- 요즘 제주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습니다. 책도 많이 나오고요. 다양한 책이 많이 나오는 건 좋은데, 생각보다 왜곡된 내용을 실고 있는 책들도 많은 것 같아요. 왜곡된 사실이 진실로 믿어지는 건 경계해야 합니다. 예전에 조사차 사람들과 산방산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 해설사가 해설을 하다가 제주 신화를 얘기하면서 '사슴'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자 해설을 듣던 관광객이 '제주에 사슴이 있냐'고 묻더군요. 그러니까 해설사가 '사슴이 아주 많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노루를 사슴으로 착각한 거 같지만, 여기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에겐 이게 정답이 되어 버리죠. 제주도에서 사슴은 1915년을 전후에서 멸종된 걸로 알고 있거든요. 이런 점들은 큰 문제입니다.
▲ "제주를 제대로 알고 말해야 해요." 강정효 작가님이 제주 입문서로 본 「한국의 발견 제주도」
페이스북을 하게 된 계기도 이와 관련이 있어요. 처음에는 '제주도에서 1인 미디어가 가능할까?라는 실험적인 생각에서 시작을 하게 되었는데, 페이스북을 막상 해보니 잘못된 정보가 SNS상 그대로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잘못된 정보를 실은 사람에게 그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어요. 언제는 어떤 사람이 세한도에 나온 나무가 '삼나무'라고 페이스북에 썼더라고요. 바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은 삼나무가 제주도에 언제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나요?'라고요. 사실 삼나무는 1920년대에 일제에 의해 들어왔거든요. 페이스북이라는 공간은 사적인 공간을 넘어 공적 장소의 의미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곳에서 잘못된 정보가 무분별하게 유통되는 것은 경계하여야 합니다.
- 지금 현재 제주도에서 사라져 가고 있어 안타까운 것들이 있나요?
- 사실 제주도에서는 거의 다 끝났어요. 해안선이니, 하천이니, 중산간, 마을 공동목장... 거의 사라져 버렸죠. 2007년 즈음 곶자왈 공유화재단이 생길 때, 곶자왈 사람들과 점심 간담회가 있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당신네 못믿겠다.. 내가 당신들을 믿으려면 선언을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곶자왈 공유재단이 생기면 제주도에 있는 국.공유 곶자왈 훼손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결국 그런 곳들은 다 개발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어요. 국회의원 집담회 중에 제주 해안선 사진을 보고 제가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어요. 해안선을 개발한다고 하는데, 다시 복원을 한다고 나중에 나설꺼고 결국 개발 전 사진을 나에게 달라고 할 거 아니냐? 그럼 난 비싸게 사진을 팔아버릴거다라고 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사실 제주도에서는 거의 다 끝났어요.
해안선이니, 하천이니, 중산간, 마을 공동목장... 거의 사라져 버렸죠.
- 아까 '제주의 가치가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주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느끼게 된 계기가 있으시다면?
- 사진을 무식하게 찍었기 때문입니다. 기자 생활을 할 때 월급이 60만원이었는데, 매달 사진에만 70만원씩을 투자했어요. 이런 사진이 쌓이기 시작한거죠. 돌, 식물, 오름, 제주의 계절, 백록담... 기록된 사진을 나누어 정리만 해도 책이 한 권 되어 버리고.. 이런 자료를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제주의 가치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돌담도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해 놓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 또 '내가하자..' 이런게 지속되어 온 것 같아요.
저는 무슨 일을 하면, 전체를 다 해버려요. 주제가 잡히면 전수조사를 하는 편입니다. 제주 신당 사진도 4달 안에 모두 돌아다니면서 다 찍고, 오름을 찍어도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찍으려고 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같은 주제에 대한 사진을 한번에 왕창 찍으면 그 흐름이 보여요. 차이점과 공통점도 바로바로 눈에 들어옵니다. 띄엄띄엄 조사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 작가님이 말씀하신 방식으로 사진을 찍으면, 지금까지 모아놓은 자료의 양도 엄청날 것 같네요.
- 슬라이드만 약 30만 컷트 되는 것 같아요. 사진뿐만 아닙니다. 제주와 관련된 책자도 보이는대로 다 모아 놓는 편입니다. 60년대 도지부터 시작해서, 제주도와 관련된 자료는 메모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 해요. 그것이 다 결국 기록이거든요. 얼마나 자료를 모아뒀냐하면, 제주대 향토자료실에도 없는 자료가 저에게 있을 정도니까요. 결국 실질적으로 '품삯'이 되지 않는 일들도 하게 되는 게 '데이터 욕심' 때문인 것 같아요. 섬 관련 책도 부탁을 받아 하다보니 제가 다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섬 책도 욕심 때문에 한 것이지요. 자료에 관한..
▲ 한라산 케이블카 관련 자료를 메모지 하나 빼놓지 않고 모아오신 강정효 작가님
- 다음 작업으로 구상하고 있는 주제가 있으신가요?
- 작업 주제라는 게, 하나를 하면 계속 연결되어 나와요. 제가 예전에 낸 책 「화산섬 돌 이야기」에는 17개의 소주제가 실려 있어요. 여기서 하나씩 떼어내면서 작업을 하죠. 다음 작업은 '산담'이 될 것 같습니다. 오름 사진 찍는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점이 '어떻게 하면 오름에서 산담이 안 나오게 할까'입니다. 사진을 곱게만 찍으려 하다보니 나타나는 문제이지요. 그러나 산담, 비석, 동자석..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게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게 비석에 나오는 '지명'입니다. 비석은 연도별로 표기가 되어 있으니, 연대별로 제주의 지명이 어떻게 불리었는지 변화를 추적할 수가 있습니다.
동자석 작업은 90년대 초에 많이 했어요. 근데 지금 똑같은 곳을 돌아보면 10개 중에 9개는 없어진 것 같더군요. 이번에 전시를 하면서 인사동에서 동자석 한쌍을 봤어요. 350만원 정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설 갤러리 같은 곳도 가보면 동자석 1-2개씩 가지고 있는 곳이 많아요. 전 최근에만 2-3군데 갤러리에서 동자석을 보았어요. 참 문제라 생각합니다.
찾아보면 제주도에서 해야 할, 할 수 있는 작업은 참 많아요.
가치가 보이는데,
아무도 연구하거나 기록할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이렇게 저렇게 찾아보면 제주도에서 해야 할, 할 수 있는 작업은 참 많아요. 근데 그만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부족한 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라산과 제주의 돌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 것도 제 스스로 답답해서였어요. 가치가 보이는데, 아무도 연구하거나 기록할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자료도 찾아봤는데, 마땅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옛 문헌을 찾다, 찾다 차라리 내가 하는게 낫겠다 해서 기록하고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한라산에 관련한 책도 2003년도에 제가 제작한 책이 있어요. 한라산에 관련된 책은 많아도 지도 정도로 보이는 수준의 책이 존재할 뿐이었는데, 한라산 관련 안내책자는 제 책이 거의 유일무이할 것이라 생각해요.
- 최근 '동굴'과 관련된 연구를 제안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네, 최근 만나기도 했습니다. 한국동굴학회가 문화재청의 연구용역을 받아서 하려는 작업이더라고요. 근데 저는 이것보다 딴짓말고 논문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박사학위 논문을 써서 마쳐야할 마감기간이 얼마남지 않았거든요. 국립공원 관리 정책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요. 정말 딴짓 말고 논문부터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 사진을 찍는다는 건 무엇일까요, 작가님?
- 다른 곳이었으면 사진을 안 찍었을 거예요. 제주니까... 제주도를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재작년쯤 바이칼을 가는 해외여행을 준비한 적이 있었어요.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거기서도 또 제가 간다고 홍보도 해 놓은 상태였어요. 근데 일정을 자세히보니, 모스크바나 다른 지역도 가는 일정이 있는 겁니다. 사실 바이칼은 가 보고 싶었지만, 다른 곳에는 흥미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거기 여행갈 시간에 제주를 찍고, 여행갈 돈으로 카메라 장비를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계약금 50만원을 포기하고 여행을 가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좀 뿔이 났지만요.
▲ 「작업의 시작과 끝」. 작가의 서재
- 작가님 이야기에는 제주, 사진 이야기가 빼놓지 않고 나오는 것 같아요. 이런 것들과 연관없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 7월 안개낀 날 할아버지 세 분이 한라산에 들어갔다 실종된 사건이 있었어요. 왜 들어갔는고 하니 묘를 이장할 자리를 보러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거욱대만 해도 그렇습니다. '땅이 허한 곳'에 거욱대를 세운다고 하잖아요. 갑자기 어디가 땅이 허한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주요 풍수를 알아야 겠다고 마음먹고, 2003년도 경에 풍수를 배우러 갔어요. 결국 역술 자격증까지 받게 되었지요.
- 소망이 있다면?
- 서울에서는 산악인 박영석 기념관 건립이 준비중에 있습니다. 80억을 들여서 건립되는데 국비로 50억, 서울시에서 10억, 모금을 통해 20억을 마련된다고 합니다. 저는 산악인 고상돈 기념관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년 쯤 판을 벌려 볼 마음으로 준비중에 있어요. 국회의원도 찾아가 만나고 했습니다. 최소 30억은 들여서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내년엔 기념관 얘기가 나올 듯 싶어요.
제주도와 관련된 자료는 메모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 해요.
그것이 다 결국 기록이거든요.
-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가 나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이 여기저기 들어가면 신뢰도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행정이니, 환경이니 이렇게 큰 틀에서라도 나누어서 전문가가 나와야해요. 세부적으로 가면 더 좋고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000년 즈음에 케이블카의 경제성 분석 자료에서 나타난 오류가 10년이 지난 2010년에도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걸 잡아내거나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2005년 즈음에는 이지훈 전 대표를 찾아가 '백서'라도 만들자로 제안했어요. 원점에서 한 얘기를 또 하고 있지만 말고 우리 선에서라도 정리를 해 놓자는 취지였죠. 제가 자료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이기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데이터를 축적해 놓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술 좋아하시나요? 얼마나 드시나요?
- 한달에 28번 마십니다. 안 마시는 날도 물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무박 2일로 마시니까요. ^^
떠나는 길에 작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놀러와도 되나요? 여기 음주도 되나요?"
"..... 막걸리 3병이면 됩니다."
작가님,
안주챙겨 곧 가겠습니다.
▲ 이소재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