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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으로서 가장 선한 생업은 농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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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만드는 사람들 2006
봄호(제44호)           
황석규가 만난 사람⑦
  


편집자주 - 이번 '만남'에는 황석규 위원장의 건강상의 이유로 약속된 날짜에 참석하지 못해 평소 관계를
맺어온 장소영님이 대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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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이었던 것 같다. 생명농업을 일구고, 일꾼을 양성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표선 가시리에 그 터전을 잡기 시작할
때였다. 그런데 이웃 땅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들려왔고, 농약을 다량 사용하는 골프장이 이웃하게 되면 친환경 농사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상의하러 단체를 찾으셨던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여러 우여곡절 속에 재단법인 ‘제주생명농업’을 세웠고, 3년이 지나 땅이 살아나기 시작한
작년부터는 본격적인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이러저러한 일로 가끔 전화도 하고 만나기도 했지만 정작 농장에는 가보지 못해, 한번 기회가 되면 꼭 가야지 하던 차에 잡힌 인터뷰라 즐거운
마음으로, 주변 동료들까지 꼬드겨 같이 가기로 했다. 갑자기 사정이 생긴 황석규 선생 대신 내가 인터뷰를 하기로 하고 농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오선생은 마중을 나와 바람이 몰아치는 마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남은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오재길 선생님은 올해로 여든 일곱이다. 추자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맺어진 방계성 전도사와의 인연으로
37년에 평양으로 가 약종상 시험에 합격해 약장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평양 상정현 교회에서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남자로 태어나서 장사로 일생을 보낸다는 것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어 뚜렷한 대안도 없이 약업을 관두었다. 그 후 서울로 이사했고,
피난 시절 장기려, 전홍휘 박사가 난민구호를 목적으로 복음병원을 설립하였을 때, 그는 병원 약국과 서무업무를 맡아 일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상경하여 함석헌 선생의 성서 강의를 듣던 중 평생을 바쳐야할 일을 발견하였다.    


 “인생으로서 가장 선한 생업은 농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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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아! 이제부터는 농사다.’라는 깨달음만을 의지해 농사법도 모르고, 돈도 없는 그는 농사 질 궁리를
하면서 몇 해를 보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61년, 마흔한 살 나이에 그는 당시 돈 50만원(5000만원정도)을 빌려 동두천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60년 4․19의 현장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지켜본 후 그 일이 자극제가 되어져 서울에서는 더 지체하지 말자는
동지(7인)들의 결의에 따르려는 행각이었지만, 자기자본과 농사기술과 체력단련 모두 빵점인 나에게는 그때 걸머진 아이들은 넷이었으니 누가 보아도
미친 사람이었을 것이다.” (『새천년 맞이 생명을 위한 제언』에서 저자의 머리말 중)


그러나 농사는 만만치 않았다. 양계하던 닭은 모두 잃어버렸고, 땅을 되팔아 빚을 갚아야했다. 그러던 중 선배들이 ‘그 사람 그렇게 방치할
순 없다’고 의논을 모아 번동에 땅을 사주고, 소나무와 밤나무 고목들로 채워진 야산은 친구들의 협력으로 개간하여 어렵게 농사를 짓게 되었다.
힘든 가운데서도 그는 ‘10년이 지나면 하나님의 새 일을 맡기실 것’이라 믿었다 한다. 이런 우직한 믿음은 막내아이를 잃고도 계속되었다.


“그 힘든 중에 아이를 잃으니 안 사람이 미쳐버렸죠, 특히 그 놈이 아주 머리가 좋았드랬어요. ……근데 기가 막히게 그때 거창고등학교에서
서무를 맡으라는 제안이 온 거예요. 그 고통 중엡… 사람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거기로 가야 할터인데.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10년이 지나면 새
일을 주실거다 했는데, 지금 떠나면 그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을 해서 떠나지 않았죠.”


그래서 그는 새 일, ‘정농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정직은 일생의 보배라’


그는 추자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정직은 일생의 보배라’는 그의 3-4학년 교실 벽에 붙여진 급훈이다. 정직을 신조로 살았던 그에게
‘정농회’가 맡겨진 것이다.


정농회는 바른 농사의 길을 가는 조직으로 성문화된 정관은 따로 없고 오로지 ‘성서’만을 그 지침으로 삼고 있고, 정농의 방법은
환경농업이이었다. 1976년, 그 때가 어떤 때인가? 증산과 건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난무하던 그 시절에 정농회는 인간의 근본인 생명문제를
놓고 씨름을 하였던 것이다.


“75년에 일본에서 고다니 쮼이찌 선생이 왔었어요. 경도대에서 농학을 전공하는 분인데 ‘애농회’라는 조직을 창설해 활동하고 있는 분이었죠.
이 분은 신앙적 양심에 근거해 한국에 가한 박해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한국농사 바꾸기에 도움이 되고자 교육을 하러 온거죠. 3박 4일의
강의였습니다. 농산물에 남은 농약으로 인한 질병에 대해 알게 되었죠. 그때 나는 소도 몇 마리 키우고, 수박농사도 지어 먹고 사는데 보태고
있었는데, 농약, 화학비료가 간접 살인이라고 하니, 내 수박을 먹고 앓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마음에 고민이 생기는 거요.”


강연에 참석한 그와 그의 동지들은 충격을 받고 어떻게 농사짓기를 바꿀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겨울동안 성찰하고 정월에 다시보자는 약속한 성원들은 76년 1월 정농회를 탄생시켰고, 오선생은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농약, 화학비료
안 된다. 생명을 지키는 농법이 되어야한다’는 원칙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던 그들에게 시련은 당연한 것이었다.


“대체적으로는 점진적으로 유기농으로 전환하는데, 우리는 의욕은 벅차오르고 방법은 몰랐으니, 단번에 차단시켰죠. 내 사과나무 경우도
그랬어요. 그때 12년짜리 사과나무가 120그루가 있었는데, 조금씩 열매를 거두기 시작하는 시점이었어요. 그런데 농약을 안 치고, 비료를 하지
않으니 나무가 점점 시들시들 마르데요. 양주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결국 80년 겨울에  사과나무로 땔감을 해 잘 보냈죠. 허허허.
계산을 해보세요. 무척 손해죠? 12년간 농사가 땔감이 되었으니. 그런데 다른 성과가 있더군요. 하나는 ‘야~ 오재길의 말은 빈말이
아니구나’라는 신뢰이고, 다른 하나는 정농회 다른 일거리로 돈이 들어옵디다. 엘리아에게 까마귀가 떡을 물어자 주었다 하잖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먹여 살려 주시더라구요.”


창립회원들은 생명을 살리는 농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유기농하는 데가 있다면 전국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배우고, 일본의 사례도 배우며
환경농업의 길을 개척해 갔다. 그리고 지금은 축산농업도 금하고 있다. 먹거리로 육류가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듯이 곡물에게도 축산농업은 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축산토비와 분뇨의 사용도 산야초을 이용한 거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요듬 일본에서는 오까다 선생의 후배들이 개척한
농법으로 이도저도 쓰지 않고 씨앗만 놓고 길러내는 농법이 있다고 한다. 우주의 기능으로 태양, 달, 별들의 기능이 지구의 기운과 합작해서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이 기본 원리로 인위적으로 투입한 것은 토양에 손해를 준다는 것이다.


제주와 다시 인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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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직 14년간을 포함한 정농회 일을 하면서 그는 꿈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생명의 농사를 짓는 인재를 양성해서 한국의 농촌 곳곳에 파송하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39년간 농사를 지어왔던 양주땅 1만 5천평이 있었다. 이 땅을 팔아 좀더 싼 당을 찾아 농림 교육원을 차리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그 땅이 팔리게 되었고, 전국을 돌아보다 제주도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재 20억을 털어 지금의
‘제주생명농업’을 세웠다.


“나를 농사짓게 해준 번동의 땅은 내 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사준 선배들의 것도 아닙니다. 그 땅이 돈 낸 사람의 땅이라고
주장한다면 성경에 어긋날 것이고, 거기에 입주해 개간한 나도 내가 농사지은 땅이니 내 것이라 주장해도 성경에 위배되는 거죠.”


그렇게 공적 자산이 된 땅을 일궈가며 만든 돈을 이제 후학 양성에 다 내놓은 것이다.
‘제주생명농업’은 설립 취지문에서 ‘환경문제가 곧 생명의 문제’로 ‘환경을 무제한으로 상품화 하고 귀중한
자원을 탕진하는 일은 생명의 사슬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 각 부야에 과감한 방향전환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면 과제의
출발점을 농업과 농법의 전환 그리고 그 일을 위한 인재양성에 두고 있다.


특히 제주도를 전국전 운동의 확산의근거지로 삼은 이유를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려는 정부와 지방자치제의 의지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정부가 어떤 생각으로 세계 평화의 섬을 추진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세계인들이 제주에서 배우고 갈 수 있어야
해요, 인류역사의 전환의 기초를 제주도에서 만들어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무시무시한 얘기요, 지나가는 얘기가 아니요! 이거하면 돈 좀 되겠지
하는 생각은 안됩니다. 인류역사의 전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주도민들이 앞장 서야합니다.”


‘세계평화의 섬’으로 공포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그 평화의 섬은 종이상에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경제살리기나 군사기지얘기가 평화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회자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일침은 너무도 예리하게 핵심을 찌른다.


그의 혜안은 재단의 사업계획에도 인재양성, 농사바꾸기, 전통적 식생활과 식품의 전승, 계발, 가공과 유통의 교육, 생명과 평화를 지향하는
전국적인 연대와 국제적인 교류까지로 이어져 있었다. 설립취지문에 이어 사업계획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들’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가 생각난다. 언젠가는 부피에의 숲처럼 생명농업도 커가리라.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야 생명농업이 살아난다.


몇 날밤을 세워도 다 못 나눌 그의 인생이야기는 이제 농산물로 관계 맺는 모든 이들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당근농사 많이
하죠. 그런데 농약 친 당근을 먹으면 해로워요. 특히 당근의 특성이 토양의 잔류 독성을 모조리 흡수하기 때문이죠. 이거는 과학자의 얘기요,
무식한 농사꾼이 하는 말이 아니라. 사는 것이 기본에 먹거리가 있는데, 밥상을 바꾸려면 농사를 바꾸어야 하고, 소비자들이 전환기 농산물을 사서
먹어야합니다.”
점심을 먹고 그의 밀밭을 둘러보았다. 봄
햇빛과 바람에 여린 밀 잎들이 너무도 곱게 반짝이면 흔들리고 있었다.


“현미가 몸에 좋은 것처럼 밀도 통밀이 좋습니다. 독일 과학자가 그러는데 통밀은 어린이 두뇌발달에 아주 좋다고 합니다. 제주도 어린이들이
통밀로 맛있는 빵을 만들어 먹고, 유기농 당근주스를 마신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산성화된 땅이 되살아나 짓기 시작한 당근농사였다. 그러나 지난 겨울에 당근을 수확하고 이를 어린이 급식에 보급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교육청이니 관청이니 이곳저곳 두드려 봐도 안됐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육지에 있는  지인들에게 조금 팔고 제주도에도 택배로
조금씩 팔고 있죠. 무척 맛있는데, 이럴게 아니라 사무실에 갑시다. 당근주스 맛보여 줄께요.”


그가 내민 주스는 상큼한 향기와 더불어 무척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고 몸에도 좋은 당근이 창고에서 썩고 있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웠다. 그는
환경운동이나 시민단체, 그리고 교회 등이 유기농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를 만들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부탁을 했다. 그런 지원이
있어야 생명농업이 확산되고 자연과 더불어 우리가 살지 않겠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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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기농산물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임신을 하면서이다. 그 전에는 여기저기서 들은 게 있어 양을 늘리거나 모양새를 좋게 하는 농약
등이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시장을 보게 되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가격차와 쉽게 고를 수 있는 편리함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먹을 게 없지’라는 식으로 지냈었다.


생협 회원으로 가입하고, 아기의 이유식을 만들며 우리집 밥상도 차츰 유기농산물이 차지하는 양과
빈도가 늘어갔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정기적으로 주문하고, 많이 사지 않게 되는 생협의 구매시스템은 충동구매나 과소비를 줄이게
해줬다.
그래도 아직까지도 우리 집 밥상은 안전하지 않다. 겉모양의 깨끗함에만 익숙한 시각은 그 안에 숨겨진
해로움을 보지 못하고, 편리함에 익숙한 습관은 당장의 가격비교와 손을 잡고 아직도 왔다갔다하는 구매를 하게 한다. 아! 무엇보다 달콤함과
부드러움에 길들어진 미각은 아직도 온갖 첨가제가 들어간 군것질로 나를 이끌고 있다. 이처럼 아는 것 따로 행동 따로 인 나 같은 사람을 포함해,
소비자를 위한 생명농업에 대한 교육과 경험의 장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농업을 통해 만난 생산자와 소비자의 만남이 역사의 전환점이 된다는 것은, 먹거리를  통해 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을꾼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사회도 바뀔 것이고 그러면 정녕 자연, 이웃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실현된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세상을 그는 이사야서에서 노래하는 평화의 신천지로 그린다. 이리는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은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이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을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