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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큰아버지 제사였습니다. 하지만 제겐, 갓 스물을 넘기자마자 비명횡사한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영정도 없다 보니 생김새마저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생전에 제사 때마다 오시곤 하던 할머니께서 까닭모를 한숨으로 저를 보시며, “니 형 닮았다”며 아버지에게 건네던 말씀으로만 더듬어 볼 따름입니다. 아버지가 우시는 걸 딱 한번 보았습니다. 뇌일혈로 8개월 넘는 병원생활을 끝내고 집에 들어서서 며칠 지나지 않은 땐가 싶습니다. 멀쩡한 자식 놈이 밥벌이할 생각은 뒷전이고 밖으로만 나대는 게 미덥지 않았던지 작정하듯 불러 세운 자리였습니다. 고집스런 제게 한참동안이나 말문을 열지 않던 끝에 “큰아버지하고 꼭 같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아련합니다. 1947년 3월 17일. 큰아버지가 중문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총에 맞은 날입니다. 할머니께선 하늘이 온통 샛노래졌었나 봅니다. 죽어가던 자식 부둥켜안고 울부짖는가 싶더니 그나마 있는 아들 하나마저 잃을까봐 그 날로 아버지를 트럭 짐칸에 떠밀어 제주읍으로 보냈습니다. 친척 분이 마침 경찰 고위직이었던 모양입니다. 우선 살려야 된다는 생각만 앞섰지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경찰서에 결혼직전까지 - 아마 61년 추자도가 마지막이라 알고 있지만 - 근무하셨답니다. 그만두고 서른 넘은 나이에 처가 근처에 자리잡고 나서도 무근성 친척집을 들락거렸고 이런저런 도움도 받았던 눈치입니다. 자연 4.3은 금기 아닌 금기어로, 어쩌다 큰 아버지에 대해서 한 두 마디 하는 정도를 빼곤, 철들 무렵까지 집안에서조차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오랜만에 음복을 자청하시더니 “그래도 니 큰 아버진 나은 편이주. 봉분이라도 성하니...” 하시며 당시 일들을 털어놓으시곤 몇 번이나 저에게 잘 받아적으라 다짐받던 그 날까지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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