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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라이브러리 5탄-강창언 제주도예원장편] -눈물의 라스트 휴먼라이브러리


대정읍 영락리에 있는 제주도예원을 찾아가는 날은 매우 맑았다.


어제까지 내렸던 비와 짖눈깨비의 흔적은 간곳없이, 맑고 청아한 햇살아래 한라산은 눈에 덮여 뽀얀 속살을 어여쁘게 빛내고 있었다.


제주도예원은 정갈하고 깨끗하였다.


입구에 있는 건물로 들어서니 강창언 원장님이 피워놓으신 난로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오른쪽 옹기 작품 전시 및 판매장 곳곳에는 손바닥만한 화반에 들꽃이 보일락 말락 웃음짓고 있었다. 사모님의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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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언 도예원장은 80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마터 발굴을 위하여 길도 없고 인적도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본격적이라고 함은 이전에 주말을 이용 한 달에 8회 정도 밖에 못 다니던 것을 직장도 관두고, 도시락을 싸서 매일 매일을 산으로 들로 출근을 하였다는 얘기다. 약 7년간을 그렇게 다니면서 발굴한 가마터가 47곳, 절터가 100곳 이상이며 그 와중에 발굴한 방사탑, 동자석, 환해장성 등의 문화재와 사적은 수도 없고, 대정읍과 한경면 일부에 도요지가 집중되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94년초 사재를 털고 은행빚을 얻어 지금의 도예원 터를 마련하고, 당시에도 거동이 불편하던 마지막 굴대장 홍태권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98년, 전세계적으로 유일한 돌가마 재현에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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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옹기에 열정을 쏟게 되신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서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풀섶에 반짝이는 옹기의 사금파리를 줍는 것이 신기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인 것 같은데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가마터를 처음 본 후 무엇을 굽는 지도 모르는 채 자주 구경을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후 자전거를 타고 반경을 넓혀가면서 찾아다녔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17살 직장생활을 할 때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말이면 어김없이 답사를 다녔다. 어딘지 알지도 못한 채, 문헌이나 자료, 기록에 한 줄이라도 언급이 되면 무조건 갔다. 한번은 한라산 녹화지가 가마터였다는 기록을 보고 3일 걸려 찾아갔는데 사람의 살았던 흔적은 있으나, 가마터는 아니었다. 자료에 교수가 썼다고 다 믿을 것은 못되더라


 


-제주의 옹기는 무엇이 다른가요?


흙, 가마, 불때는 방식 등 모든 게 다 다르다. ‘고냉이철흙’이라고 부르는 제주의 질흙으로 옹기를 만들어 여섯달에서 길게는 열달동안 움집에서 서서히 말린다. 그런후 현무암중에서 도 해량돌을 써서 만든 돌가마에 넣고 생가지다발을 땔감으로 해서 사나흘 굽는다.


제주의 옹기는 유약을 전혀 바르지 않는다. 제주의 질흙과 돌가마, 섬피가 1200도의 뜨거운 불 안에서 만나 얼크러지면서 마치 유약을 바른 듯한 효과가 나타난다.


 



-돌가마는 제주에만 있는 건가요?


세계에서 유일하다. 도예원 터를 잡고 돌가마를 복원하고자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녔다. 너도나도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막상 만들 시점이 되자 뒤로 빼는 사람들 뿐이었다. 남들이 다 아는체 할 때 아무 말없이 뒤로 물러서 있던 분이 계셨는데, 동네에서는 다들 말을 잃었다고 하시던 분이었다. 나는 굴(가마) 얘기만 나오면 생기있게 빛내시던 그분의 눈을 보고 반드시 전통가마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어 몇 년간을 술을 사다 드리며 쫓아다녔다. 그 분이 처음 ‘나가서 기다리라’ 고 하던 당시를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이 감독을 하시면서 40년간 완전히 끊어져있던 돌가마가 복원될 수 있었다. 돌가마는 내가 예상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조상들의 과학성과 창조성에 놀랄 뿐이었다. 술을 좋아하셔서 늘 취해계셨지만, 몸은 흔들리지언정 한번도 실수한적 없고, 나에게는 항상 존대말을 쓰시던 홍태권 할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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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옹기제작 과정을 보면 허벅장, 굴대장, 불대장, 옹기장, 건애꾼 등 각기 분업화 되어 있던데..


분업화된 가마가 있고 개인 가마가 있다. 두 가지가 공존했는데 근대화과정에서 대량 생산의 필요가 생기면서 분업화가 된 것 같다. 전통방식으로 옹기를 제작하는 데에는 총 1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처럼 언제든 전기 가마로 구워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흙을 퍼오고 거르고 숙성시키는데 한 두달, 옹기를 만드는데 또 한 두달, 만든 옹기를 움집에 넣어 말리는데 여섯 달에서 열 달이 걸린다. 옹기가 숙성되는 동안 섬피를 모아 다발을 만들어 땔감이 다 준비되면 가마를 때서 옹기를 굽는다.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다. 대량으로 만들 땐 분업이 되어 있으면 편리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어르신들은 자기분야만 안다. 건애꾼은 몇십년을 옹기를 만드는 걸 지켜봤을 텐데 옹기 만드는 것에 대해선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불 때는 분은 가마에 대해 전혀 모르고... 복원할 때는 이런 것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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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굽던 어르신 들이 거의 돌아가시고 몇분 남지 않았는데, 전수나 후진 양성은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30년이 넘도록 오로지 전통 가마와 옹기 복원에만 초점을 맞춰 달려왔다. 나의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이후는 생각지 않았다.


복원만 된다면야 매월 월급만 주면 배울 사람이 줄을 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모든 노하우를 전수하고 교육도 하고 했지만, 이곳에서 조금 배우면 곧 다른 곳으로 가 버리고 전통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이는 없었다.


굴대장 홍태권, 마지막 불대장 강신원 등 제주 옹기를 굽던 어르신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살아계신 분들은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내 나이 50이 넘었고, 생이란 알수 없어서 당장 내일이라도 심장마비로 죽을지 누가 아나? 지금 이 상태에서는 내가 죽으면 이대로 제주 전통옹기의 맥은 끊어지고 만다.


전통옹기는 말했듯이 한번 제작하는데 1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제대로 알려면 최소 10년은 배워야 한다. 양심을 가지고 작업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제주 옹기의 특별함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옹기를 만들 때, 말릴 때, 구울때 등 1년의 전 과정이 체계화되어 있다. 한 단계라도 따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옹기가 나오지 않는다.


복원은 완벽해야 한다. 나에게는 홍태권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연장이 있다. 연장부터 돌깨는 것부터, 가마부터 흙부터 복원은 그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야 한다. 역사를 속이면 안된다.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다. 절대!!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다....


어린왕자가 사막에서 만난 여우가 말했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비주얼을 외치는 세상에서 돈을 주어도 아무려 배우지 않는 길을 고수하고 있는 강창언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모두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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