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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없는 학살의 기억 '교동도'


참여환경연대 한반도 평화기행이 마침내 마지막 여정에 다다랐다.
교동도는 남쪽으로 강화도, 북쪽으로는 황해도 연백을 각각 3km의
거리에 있는 그야말로 분단의 경계이다. 또 강화도를 넘어야 닿을 수는 있는 ‘섬 너머의 섬’이다.


이런 이유로 아직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다. 이북 실향민과 일부 관광객이 종종 찾지만, 특히 관광객들은 지레 짐작하고 차량 없이 들어섰다거
의외로 큰 섬의 규모에 놀라 돌아가곤 한다. 교동도는 1,400만평에 이르는 작지 않은 섬이다.  1,400여 가구의 이 곳 주민들의
80% 이상은 벼농사 등 농사일을 주업으로 한다. 교동도 일대를 지나다 보면 양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지대와 만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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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도로 가는 길
 
‘유배의 섬’ 교동도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연산군과 임해군, 안평대군 등이 유배했던 유배의 섬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마지막을 보낸 광해군도 이 곳을 거쳐
갔다. 주로 '왕실 유배‘가 주를 이뤘던 것은 아마 지리적으로나 정치전략상의 ’감시 효과‘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동도는 섬을 중심으로
한강,임진강, 예성강이 만나면서 센 물살을 형성한다. 때문에 섬에서의 ’탈출‘은 곧 죽음을 의미했고, 서울에서 멀지 않아 통제가 용이해 유배자가
반란을 도모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지금도 그렇지만 이 곳은 예로 부터도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황해-경기- 충청을 관장하는 ‘삼도수군통어영’도 바로 이 곳에
자리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교동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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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도를 설명하는 구본선 목사
 
예외 없는 ‘학살’의
기억


한국 전쟁을 전후해 한반도 여느 곳을 막론하고 ‘학살의 기억’이 없는 곳이 있을까?
평화순례단은 소록도에서 이 곧 교동도에 이를
때까지 극심한 이념갈등의 댓가로 치러진 학살의 기억이 곳곳에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고한 죽음들의 역사를 가는 곳마다 확인하는 일은
참으로 ‘평화’가 추상의 언어가 아닌 현실의 실천원리여야 함을 체감하게 한다.


순례단이 교동도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안내해 준 교동교회 구본선 목사가 우리를 처음 데려간 곳도 바로 학살의 현장이었다. 참가자들은 교동면
상계리의 왕계산 자락에서 학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강화 교동 일대는 다른 지역과 달리 보도연맹 사건 등과는 상관 없이 이뤄졌다.
교동도의 위치상 한국전쟁 발발 시점 보다는 1·4후퇴를 기점으로 군경이 아닌 황해도에서 건너온 우익들에 의해 저질러 졌다고 한다.


교동도는 섬 전체적으로 약 4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실종자까지 합치면 1,000명 수준으로 짐작되고 있다. 희생자
대부분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양민이나 월북 가족 등이다. 교동도 앞 ‘상여바위’에서도 학살 수장이 행해졌는데, 이 일대의 물살이 워낙 강해
주검이 멀리 연평도 해안까지 떠밀려 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진실규명은 요원해 보인다. 순례단이 찾아간 학살터에는 여전히 주검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 철저히 외부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사건이 여전히 조명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구목사에 따르면 이미 피해자 가족들은
교동도를 떠난 지 오래다. 그나마의 유가족들도 희생자 피해 신고 건수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한국전쟁 이후 가해지역의 주민이라 할 수 있는
황해도 연백주민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군사지역으로 묶이면서 오래전 있었던 군대의 횡포는 주민들에게 일상적 공포의 대상이 되게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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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에 세워진 교동교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양민학살 사건의 위령을 위해
강화학살자유족회가 만들어져 있지만, 아직은 미약하다고 한다. 또한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한성대의 김귀옥 교수의 관심이 유일한 정도라고
한다. ( href="http://www.hansung.ac.kr/~freeox/">http://www.hansung.ac.kr/~freeox/)


우리나라 곳곳에서 한국전쟁기를 전후해 양민학살이 자행되지 않았던 곳이 과연 어디 있을까? 분단체제를 넘는 고개 길에서 과거청산은 반드시
풀어야 할 ‘업’이 아닐까 싶다. 교동도는 그 역사안에서 신음하며, 다시 분단의 경계에 서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보여졌다. 누가 이 매듭을 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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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여구의 민간인 희생자 시신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교동도
왕계산 학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