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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에서 ‘백배사죄’로 평화를 얻다


참가자들의 평화여정이 나흘을 넘겼다. 소록도와 광주에서 ‘죽음’에 숙연했던 대학생
참가자들은 지리사 자락에 이르러 또 다른 여정을 향한 상승의 기운을 채우고 있다. 한라산과 더불어 영산(靈山)으로 불리는 지리산의 영험함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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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자들은 광주의 무덥고 찌든 '죽음'의 무게를 넘어서 새로운 상승의
기운을 채워가고 있다. 비내리는 지리산 실상사에서의 참가자들.
 
‘반골’의 준령, 지리산


‘지혜로운 산’을 뜻하는 지리산(智異山)은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있어서 ‘불복산(不伏山)’으로 명명되었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씨는
지리산에 얽힌 내력을 이렇게 풀어갔다.


혁명, 혹은 쿠데타를 준비하던 이성계는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건국구상에 나선다.
하지만 소위 ‘영발’이 있는 명산에서 제를
올리고 ‘소지(제문을 태우는 행위)‘를 행하던 그에게 지리산은 이를 품어주지 않았다. 노고단에서 제를 행하며 소지를 올렸지만, 그것이 하늘로
향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영험하기로 소문난 남해의 금산에게는 대사가 성공할 경우 비단 옷을 입혀주겠다던 이성계는 때문에 지리산을
’불복산‘이라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한 마디로 ’반골‘로 찍힌 것이다.


나아가 이성계는 이걸로 끝내지 않았다. 그 때부터 지리산 권역에서 아무리 출중한 인물이 배출되어도 이를 중용하지 않았을뿐 더러, 즉시 숙청
혹은 유배의 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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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과 이념의 상징처럼 타올랐던 지리산. 이제 비로소 평화를
품었나.
 
지리산은 또한 ‘적구산(赤狗山)’으로
불렸다. ‘붉은 개의 산’이다. 이는 지리산이 빨치산의 거점으로 이용되면서 이념대결의 장소로 이어졌던 탓이다. 이렇듯 지리산은 이미 오랜 역사
이래로 ‘저항’과 ‘이념’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여전히 장엄한 산세는 그 ‘반골’의 준령으로 인해 광범한 운무마저 감히 휘감지 못하는 듯 하다.
하지만 지리산은 거의 매일 많은 사람들을 품는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또한 품으로 묻어야 했던 지리산의 위령과 이념대립의 아픔을 달래며 치렀던
도법스님의 ‘천일 기도’와 생명평화의 천도가 작용한 탓일까?
주민간의 갈등과 여러 논란을 낳았던 동강댐의 백지화 과정과 달리 일제때부터
계획되었다던 지리산 댐은 무혈과 무쟁의 영성으로 그것의 무리함을 물리치게 되기도 했다.


 백번의 절을 올리며 평화를 서원하다


반골의 산, 지리산은 이제 비로소 평화를 품었던가. 참가자들은 지리산 자락에 이르러서야 소록도와 광주에서 내내 짓눌렸던 ‘죽음’의 무게를
새로운 상승의 기운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참가자 모두는 백번의 절을 올렸다. 처음은 ‘진리가 삶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둘째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문제 해결의 첫 걸음임을 마음에 새기며’, 그리고 ‘삶의 근본을 모르고 사는 나의 어리석음을 돌아보며’, ...
‘소유와 힘의 논리, 경쟁과 지배의 논리로 살아온 왜곡된 자기사랑의 삶을 참회하며’, 이렇게 아흔 아홉 번의 서원을 담은 절을 머리를 바닥에
대고 가슴을 낮음에 이르게 하며 올리던 절은 이내 백 번째 ‘내가 밝힌 생명평화의 등불로 온 누리의 뭇 생명들이 진정으로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발원하며’올리는 절로 끝맺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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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자들은 평화의 공감으로 벌써부터 또 다른 계획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백배사죄, 백번의 절로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서야 새로운 상승과 평온의 기운을 채웠던 것이다. 이 ‘생명평화의 100배 서원’은 지리산에서 시작해 제주를 첫
기점으로 해서 지금도 이어지는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행하는 <지리산생명평화결사>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급되고 있다. 2006년 순례를
시작하면서 도법스님은 올해 순례부터 ‘생명평화 100배 운동’계획을 이렇게 밝혔다.


  “흔히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며 참회할 때 ‘백배 사죄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제는
생명평화를 근본원리로 삼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적은 문구를 외면서 100번 절하는 운동이 바로 생명평화 100배 서원입니다”


‘온숨’(백번의 호흡)이라는 CD로 제작된 이 음반은 6살 아이에서부터 60세를 훌쩍 넘긴 노인에게 까지 25명의 남녀노소가 다양한 삶의
질곡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백배 서원문을 낭송하는 형태로 구성됐다. 100배 서원이 끝나면 CD는 또 5곡의 명상음악도 연이어 풀어준다. 약
30분의 시간으로 자기성찰과 몸의 유연함을 키울 수 있는 이 음반은 전국 3,800명의 ‘생명평화 등불’로 등록한 사람들에게 보급되고 있으며,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가고 있다. (※ 음반주문처 : 063-636-1950/생명평화결사 사무국, href="http://www.lifepeace.org/">www.lifepea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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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생명평화결사'와의 만남.
 
평화는 ‘미워하지 않는
것’


이 날 평화기행 참가자들은 <지리산생명평화결사>와의 만남에서 평화란 ‘미워하지 않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마음에 담았다. 미운
상대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오히려 그 상대의 에너지로 작용해 더 큰 갈등과 대립의 반복을 몰고 올 뿐이다. 이는 지리산 댐 건설을 막게 된
배경이 오히려 ‘댐 건설 반대’를 이야기하기 보다 지리산 100일 기도와 평화의 순례에서 결정적으로 기인했음을 말하는 이원규 시인의 언급에서도
드러나는 듯 하다.


살기도 바쁜 세상에 생명평화의 언어는 자칫 사치스런 낭만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래서인가 평화는 “단지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평화결사의 신희지 씨는 “그러나 이 미워하지 않은 것은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한다. 미운 상대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평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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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생명연대'에서 이원규 시인과 함께.
 
“미움은 차이짓기입니다. 결국 자기중심인
거죠. 자기중심은 폭력의 시작입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장 어렵지만 실천해야 할 평화의 행위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77번째 절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미워하고, 나의 견해만이 옳다는 생각이 폭력의 시작임을 가슴에 새기며’ 올려졌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만큼, 나의 삶의 더욱 빛난다’는 75번째의 절을 음미하게 된다.


 어떻게 평화에 이를까?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이는 제주에서 출발해 벌써 3년째 이뤄지는 생명평화탁발순례가 설파하는
화두이다.
<지리산생명평화결사>에서 발행된 소식지의 다음 시를 인용하는 것으로 ‘나’의 평화를 소망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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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규
 


강가의 모래알 하나가 나고
투명한 속살의 어린 감잎이
나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도심의 고양이가 나고
보도블럭을 비집고 올라온 풀꽃 하나가 나다.
저 거친 빗줄기나 소슬한
바람
저렇게 세상의 시간을 흐르는 것들이 모두 나다
그것들이 다 내 생명이다.


선생이라는 이름을 벗고
시인이라는 이름을 벗고
아버지라는 이름을
벗고
박두규라는 이름마저 벗고
발가벗은 몸뚱어리, 헐벗은 영혼으로 남아
그 생명에 이르고 싶다.


그래, 일단은 그것이 내 꿈이고 나다.
흔적도 없이 잘게
부서지거나
존재도 없는 부유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생명에 이를 수 있을까.
또 그러다
보면
그 평화에도 이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