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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기


시장성과 잔인성 우리가 먹는 고기라면 닭, 돼지, 쇠고기를 우선 떠올린다. 닭과 돼지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일정량 생산된다. 그것들을 키우는 곳을 가본 적이 있는가. “가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 이건 달인의 말도 아니고 한번만 본 사람이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공장식 농장이란 곳은 그야말로 지상에 있는 지옥이다. 닭 한 마리가 A4 용지 한 장 공간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몸을 돌리지도 못하는 사료만 먹고 달걀만 낳고 있다. 그건 동물의 운명이라고 해도, 거기에서 나는 악취 또한 지옥을 연상케 한다. 돼지 사육장의 악취는 살인적이다. 대정읍 구억리의 도요지 터 노랑굴을 찾다가 길을 잘못 들어섰더니 죽음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의 오물에서 나는 냄새는 코와 눈을 마비시키고 뇌를 조여 왔다. 돼지 500마리에서 매일 2톤 정도의 분뇨가 쏟아져 나온다니 고기를 얻으려다가 우리 주변을 모두 똥으로 오염시키고 있다. 그런데 왜 공장식 동물 사육을 그만 두지 않는가. 고기를 먹는 우리들이 있기 때문이고, 고기 생산이 상품 생산과 같은 것이니 단가를 낮추어야 할 것이고, 모든 것은 시장성의 지배 하에서 이루어진다. 마취 없이 거세가 이루어지는 것도 비용 절감을 위해서이고, 오염에 신경 쓰지 않는 것도 가격 경쟁력을 위해서다. 그래서 동물들이 생명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고, 우리는 형편 없는 고기를 먹고 있다. 동물에 대한 잔인성이 극에 달했고 인간은 스스로를 자학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도 무덤덤하다. 왜? 먹고 사는 생활에 여념이 없기 때문인 평범한 소시민의 무감각 때문이리라. 윤리적 식사 원칙 우리는 고기가 아니라 쓰레기를 먹고 있다. 생김새만 고기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사료 덩어리를 씹고 있다고 할까. 그만하면 다행이게, 우리는 사육되는 동물 속에 투여된 온갖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을 먹고 있다. 그것뿐일까. 하루 24시간 똥냄새를 호흡하는 동물들이 만들어낸 스트레스와 분노를 함께 섭취하고 있다. 그래서 고기를 먹으면 화가 는다. 공격적이 된다. 그리고 파괴적이 된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살해하고자 하는 유전인자를 키워 세상이 두렵게 된다. 그래도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공장식 농장에서 생산된 고기를 거부하라. 그리고 풀밭에서 자유롭게 키운 소나 돼지를 선택해야 한다. 항생제를 주지 않고 무농약 유기농 사료로 키운 동물을 먹으면 된다. 인도적 사육을 인증받은 동물을 팔고 사는 시스템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가급적이면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하는 길이다. 곡물로 동물을 키우는 방식이 너무 낭비적이기 때문이다. 1 Kg 쇠고기를 위해 21 Kg의 곡물이 필요하다. 육식 위주의 생활은 갈수록 늘어나는 인구를 다 먹여 살릴 수 없고, 기아로 허덕이는 수억 인구를 살릴 수 없다. 생태주의적 소박한 생활방식을 찾아야 한다. 이 즈음 우리는 육식의 폐해를 고민하고 있는데, 서양은 벌써 윤리적 원칙을 고민하고 있다.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윤리적인 고려사항이란, 노동문제, 기업 책임, 동물 복지를 비롯하여 환경을 고민하는 단계인데, 그 식품의 에너지 효율, 수질 보전, 폐기물 관리, 유독성 부산물의 처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어디 쯤일까. 우리는 식품의 에너지 효율에 관심조차 있었던가. 제3세계에 살면서 제1세계의 삶을 추종하고 있는데, 그 방식이란 한물 간 ‘이마트 쇼핑하기’ 정도에 머물고 있다. 할머니들이 살던 구질구질한 방법을 버리고, 초현대식 건물에 온갖 상품이 구비되어 있고 왠지 거기에 가면 중산층이 된 기분과 쾌적한 삶을 즐긴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대형 마트적 삶을 살려고 한다. 지금 유럽에서는 할머니들이 살던 그 구질구질한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우린 무언가. 남을 걱정 말고 우리를 걱정하자 맹자가 어느 날 양혜왕을 만났더니 “나를 이롭게 하려고 왔느냐”라 묻자, “하필 이(利)를 말하십니까.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맹자는 말한다. 왕이 이익을 생각하면 신하도 백성도 모두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를 착취하고, 결국 손해를 본 아래가 위를 죽이는 일도 생겨난다고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통령과 재벌이 합심하여 이익을 챙기는 데 혈안이니 언젠가는 아래가 위를 혐오하고 급기야 아래가 위를 바꾸어버릴 가능성도 짙다. 이 정권이 멀지 않음을 보면서 감옥에 나란히 앉은 형제를 연상한다. 허나 맹자도 잘사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연못에 그물을 넣을 때 너무 촘촘한 그물을 쓰지 말고, 잡힌 물고기가 척(30센치)이 되지 않으면 시장에서 팔 수 없도록 하면 사람들이 실컷 물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옆집 아저씨는 쌍끌이 저인망으로 물고기를 싹쓸이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성근 그물로 고기를 잡으라고 하면 굶어죽으라는 소리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 신경 쓰지 말고 도리를 행하면 된다고 맹자는 가르친다. 남 걱정 말고 자신의 도리를 다하며,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을 걱정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함께 먹고 사는 방식이 바로 의(義)다. 인도적인, 윤리적인 법칙은 의로움에서 온다. 그래서 윤리와 편리는 화합할 수 있다. 허 남 춘 (출판미디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