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비사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궁핍을 애호했다는 점입니다. 즉,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돈을 정신의 노예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정신의 존엄성이 물질에 의해 좌우되지 않게 하기 위한 가치체계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 가치체계는 금전의 경시와 경제 산업의 천시풍조를 빚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순서가 상,공,농,사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를 다른 쪽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의 발전동기(動機)는 궁핍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철학 없이 궁핍을 벗어나는 데만 몰두하면 인격형성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동기까지는 좋았으나 동기가 성취되고 난 후의 나태함, 교만함을 경계한 것입니다.
요즈음 부자로 사는 사람들은 위장전입을 해서라도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도 합니다. 부잣집 자식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상식은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돈이 정신을 지배해 버린 세상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자식만큼은 궁핍하게 길렀던 우리 조상들의 뜻이 왜곡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쓴웃음을 짓습니다.
남의 집 머슴으로 살 때는 꽁보리밥도 그렇게 맛이 있었는데 부잣집 처가에서 며칠 살다보니 그렇게 맛이 있던 꽁보리밥이 맛이 없게 되어 버렸다는 얘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의 풍요에서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위(自慰)하기 위한 얘기가 아니라 각종 통계가 가르치고 있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의 행복은 정신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富)에서 행복을 추구하다보면 그 이상의 금전적 행복으로의 상승작용으로 보다 많은 부를 요구하게 되고 이를 위해서 또 다시 막대한 부의 소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실덕(失德), 범죄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나라당 경선과정에서 양파껍질 이야기가 나옵니다. 벗기면 벗길수록 의혹이 있다는 내용은 이 부(富)와 관련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앞에서 말한 부의 축적과정에 대한 시비입니다.
자신의 발전동기를 궁핍의 해방에서 찾았다면 어느 정도 성취에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