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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유기 칼럼] '산업발전'에서 '행복발전'의 사회로!

    2011-03-21 14:20:14
  • 작성자참여환경연대 (admin) 조회수2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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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 발전’에서 ‘행복 발전’의 사회로!


    - 제주의 가능성, 복지국가의 선도지역으로 가자.




    유난히 추웠던 혹한의 겨울도 이제 그 끄트머리에 섰다. 지난 주말은 봄처럼 햇살이 빛났다.



    다가올 봄에 대한 기대처럼 최근 우리사회에 미래에 대한 논의가 붐을 이루고 있다. 그것도 아주 뚜렷한 형태로 말이다. 이른바 ‘복지국가’ 논의가 그것이다. 시장논리에 의해 개인의 삶이 결정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동등한 기회와 혜택을 누리고 권리를 보장받는 '보편적 복지'를 주된 임무로 하는 국가의 틀을 새로 짜자는 것이다. 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만 국가가 선별해서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방식’의 기존 국가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국민의 건강, 최소한의 수입과 일자리, 보육과 교육, 주택 등을 국가가 직접 책임질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민권을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사회발전도 보다 성숙하고 정의롭게 세우는 작업이다. 그리고 경제발전의 패러다임도 이를 통해 더욱 효과적인 차원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경제위기로 세계가 고통받는 오늘 날,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북구유럽의 모습은 복지국가가 '20세기 문명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라는 찬사가 왜 나왔는지 여전히 유효하게 보여준다.



    ‘복지국가’라는 대세



    한국사회는 지난 10년 동안 두 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빈곤화, 고령화와 저출산, 비정규직 양산과 노동차별 등의 사회문제가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경제위기가 급기야 사회위기로 전환되었다. 어려워진 경제에 위기! 위기! 하며 빨간불을 켜느라 여념이 없는 시간동안 사회는 단기간에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추락했다. 어려워진 경제만큼, 사회의 해체를 막을 안전장치를 채 갖추지 못한 탓이다.


    한국은 이미 불평등, 빈곤율, 이혼율, 자살률에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 되고 말았다. 10년 동안 국민기초활보장제가 도입되고, 건강보험 보장율이 확대되고, 기초노령연금제도 등이 도입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IMF 경제위기에 따른 불가피한 자구책이었을 따름이라는 해석이 강하다. 강력한 구조조정 등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의 발생을 최소화하고 저항을 완충하기 위한 대응책 수준은 이른바 '잔여적 복지'만 고착화함으로써 오히려 평등의 조건만 더욱 후퇴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지금, 왜 복지국가인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는 불평등과 가난, 실업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복지국가라는 새로운 틀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도 복지국가는 적어도 우리 사회의 진로를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미 국민들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이에 대한 갈망을 부쩍 드러내고 있다. 경제성장보다는 분배와 복지같은 삶의 문제의 개선을 정치가 해야할 우선과제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문제로 승패가 갈린 현상만으로도 이는 뒷받침되고 있다.


    한국이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내용의 차이는 있지만, 진보․보수도 크게 갈리지 않는 분위기다. 국내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은 일찍이 자신의 강령 안에서 사실상 복지국가의 비전을 대안으로 채택하고 있다. 민주당은 소위 ‘3+1 무상복지 시리즈’로 정치적 돌파구 만들기에 나서고 있고, 대표적 보수 정치인 박근혜도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안을 매개로 한 ‘복지’를 정치적 승부수로 삼으려 하고 있다. 한나라당도 예외가 아니어서 당 일각에서 "통일된 선진복지국가를 목표로 개혁적 중도보수 노선을 추구할 것" (한나라당 나성린 비전위원장)이라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지금 급속하게 번지는 복지국가 담론은, 비단 국가정책 수준의 차원을 넘는 우리사회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밝히는 대안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불평등과 가난, 차별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삶을 바꾸는 장치일뿐더러, 경제성장과 일자리의 대안은 물론, 지식기반사회로 일컬어지는 21세기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주장까지, 복지국가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밝히는 최적의 대안으로 공감대를 얻고 있다.



    물론, 사회권의 전통이 부재하다시피 한 한국사회의 특수성에서부터 '불우이웃 돕기'로 굳어진 복지에 대한 인식, 국가재원의 마련, 경제발전과 연동한 정책의 문제, 나아가 잘못된 사회관행, 부패문제에 이르기까지 앞에 놓인 과제들은 넘치지만, 복지국가로 이름붙여지는 사회의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나아갈 듯 하다.



    복지국가의 가능성, 제주가 보여주자



    제주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는 ‘복지국가’야말로 제주가 갖는 가능성을 매개로 제주가 내외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프레임이 된다고 생각한다. 제주가 갖는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섬이라는, 울타리가 분명한 지리적 조건과 인구규모는 제주사회 전체를 새로운 방향으로 디자인하기에 보다 용이하다. 국제자유도시 등 시장정책을 우선시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적부문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이고, 그 만큼 상대적으로 공공의 인프라도 발달된 지역이라 하겠다. 여기에 수눌움이라는 복지전통까지. 제주야말로 복지국가를 설계하는 선도지역으로서 매우 적합한 여건에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제주는 대한민국 복지국가의 미래를 선도하는 지역으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제주경제 구조에서 공공부문의 비중은 매우 높은데, 이것이 시장‘밖’ 행위의 창출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가능성’이 될 수 있다.


    단순한 접근이지만, 공적예산 비중에 따른 복지지출 가능성면에서 제주의 여건은 상대적으로 우월하다. 서유럽 복지국가들은 국민총생산의 50~60%를 예산이 차지하고, 그 중 다시 50~60%를 복지지출이 차지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한국은 국민총생산의 약 30%, 그것의 25%만이 복지에 쓰인다. 제주도는 어떤가? 비록 복지예산 비중은 아직 전체 예산의 16% 수준에 불과하지만, 제주의 예산규모는 제주도 총생산의 최대 50%수준을 점한다. 시장 바깥에서 이뤄지는 복지국가의 행위에 필요한 예산조달이란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지역 경제규모에 비해 마음 먹기에 따라 조달 가능한 예산 범위가 폭넓은 장점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에, 도내 소비의 약 30% 가까이가 공공부문에 의존하는 경향은 지역경제의 작동구조 자체가 공적 예산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시사한다. 제주경제의 이러한 경향은 시장적 관점에서는 효율성과 건전성이 낮다고 볼 수 있지만, 공적서비스 체제지향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 전체 피고용자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공공부문 일자리의 상당부분이 복지서비스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는 공공부문의 비중이 큰 제주가 복지서비스의 확대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여건에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경제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면, 이를 활용하여 복지서비스 체제를 일으켜 주민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임은 물론, 또한 그것이 곧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내수성장으로 이어지는 식의 선순환 경제에 대한 구상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예산의 많은 부분을 국가예산이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국가보조사업의 성격과 내용을 전환하는 일일 따름이다. 제주도 재정상태가 매우 안좋다고 하지만, 이는 방만한 재정운영에 기인한 탓이 크다고 본다. 재정 건정성을 도모하는 재정개혁과 세수원의 발굴등도 특별자치 체제를 활용해 나간다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 방향을 두고 무엇을 우선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두 번째는,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제주의 특별자치체제 또한 제주의 가능성을 밝히는 장점이 된다. 제주가 복지국가의 전범(典範)이 되도록 하는데 필요한 정책을 적어도 제주에서는 우선 가능하도록 특별법을 통해 제주에 맞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개정법안에서는 사회정책분야의 제도이양이 보다 폭넓게 이뤄지고 있는데, 이것을 제주만의 내용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중요할 것이다.


    제주에서는 그 동안 특별자치를 매개로 발전전략과 연동한 제도 선점전략을 펴 왔다. 하지만 그에 따른 중앙정부에 대한 요구는 그것이 좋은 정책이냐 나쁜 정책이냐를 떠나 언제나 ‘무리한 것’이었고, 그 만큼 설득력을 갖기 못했다. 때문에, 제주를 복지국가의 모델로 세우겠다는 발상의 전환은 특별법을 매개로 제주만의 각종 특혜제도나 사업을 백화점식으로 요구하는 기존 방식보다 그것이 국가지향모델(물론 이제 시작이고 논쟁중이지만)과 일치한 선도전략으로 간다면, 중앙정부에 대해 훨씬 나은 설득구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세 번째는 가능성이라기 보다는 방향의 설정과 관련한 문제다. 제주는 국제자유도시를 미래의 발전전략으로 삼고, ‘이상적 자유시장 모델’을 모토로 내세웠다. 그러나 단적으로 한미FTA협상 과정에서 감귤을 협상대상품목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식의 모토와는 상반된 요구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제주의 사정이다. 아울러, 자본의 역내 진입을 쉽게 하기 위해 각종 규제철폐에 몰입해 왔지만, 그것이 실제 성과로 이어질까 하는 점에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도 크다.


    제주는 여전히 감귤과 1차산업으로 먹고 살고, 내국인이 주류를 이루는 관광으로 스스로를 지탱해 가고 있다. 그 관광이라는 것도 자본투자에 의한 개발방식도 있지만, 오히려 제주의 고유한 자연자원이나 문화자산이 위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흐름이 가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나?


    자본 중심의 발전구도가 제주에 적합, 혹은 유효한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제주뿐만 아니라, 이미 한국경제도 더 이상 경제규모를 키우는 식으로는 발전동력을 가질 수 없다는 진단이 잇따른지 오래다. 이른바 낙수효과(trikle down effect)를 추구하는 경제전략이 오히려 승자독식의 사회를 강화시키고, 경제의 퇴행만 불러온다는 것은 지금 정부에서 충분히 겪고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복지국가’이기도 한 것이다. 제주 또한 자본유치를 통해 투자를 늘리고, 이것으로 경제규모를 키워 주민들이 잘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제, ‘자본 중심’에서 ‘사람 중심’의 발전을 생각해야 한다.


    노후의 삶이 불안하지 않도록 노인복지를 잘해서 사람들이 노후에 대비한 저축에 연연하기 보다는 건강한 소비에 참여함으로서 내수를 늘릴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육이나 탁아서비스를 제대로 만들어 여성의 경제활동을 늘리고, 더불어 생산력이 높아지도록 해야 한다. 공공의료의 획기적 개선으로 사람들의 건강은 물론 경제활동의 의욕을 붇돋아 줘야 한다. 일자리를 잃더라도 불안하지 않도록 재충전과 재교육 체계를 촘촘히 갖추고, 노동조건을 제주에서 만큼이라도 잘 만들어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사회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출산, 보육, 교육, 일, 퇴직과 노후로 이어지는 생애 전 과정에서 적어도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회적․경제적 위험으로부터 잘 보호되는 그런 제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주가 더 이상 이혼율이 높고 빈곤율이 높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과 가족이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며 안심하고 화목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가는 것이 정말로 제주의 경제가 좋아지고, 제주의 위상이 높아지고, ‘세계가 찾는 제주’가 되는 길임을 복지국가 논쟁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그 동안 지역발전과 관련한 논의는 대체로 산업구조개편이니, 신성장동력이니 하는 전통적인 산업발전 담론으로 채워져 왔다. 하지만 사람이 있어야 산업도 있고, 발전도 있는 것이다. 이제 진짜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 크게 일어나는 복지국가 담론은 비로소 이를 증명한다. 이제, 제주의 발전담론도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산업을 육성할까?’, ‘어떻게 하면 균형발전을 이룰까’ 하는 것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까?’ ‘어떻게 하면 도민들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할까? 하는 것으로 말이다. <끝>


     


    - 고유기 (정책위원장)


    * 본 칼럼은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