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가 그리는 풍경은 암울하고 충격적이다. 어느날 갑자기,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시력을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인간의 오감(五感)중에서도 시각(視覺)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 소위 현대문명일 터, 시력을 잃어버린 인간사회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다. 그 와중에 긍정적인 면이라면 시각적 인지에서 비롯한 편견과 차별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생존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경쟁과 본능인 사회, 문명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어느 만큼 빨리 포기하느냐가 얼마나 오래 살아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눈 먼 자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다른 데 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까닭에 갑작스레 눈이 멀어버린 자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 혹은 이 비극적 사태에서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의 존재가 그것이다.
눈 먼 자들은 이 '리더'들을 따름으로써 생존을 보장받거나 혹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기회를 제공받는다. '리더' 개인의 도덕성은 눈 먼 자들의 사회가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지, 그리하여 결국 해피앤딩으로 귀결할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반면 그의 또다른 소설 '눈 뜬 자들의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되는 사태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눈을 뜬다는 행위는 무언가 자각하고 표출하는, 지성의 발현을 말한다.
'눈 뜬 자들의 도시'는 집단지성의 등장에 대해 권력이 반응하는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권력은 대중이 똑똑해지는 것,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OECD 가입국가 가운데 우리나라의 문서해독률이 거의 꼴찌 수준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서해독능력비교는 봉급명세서, 대중교통시간표, 지도 등 일상적인 문서를 이해해 이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능력을 비교한 것으로 보다 실질적인 문맹률로 간주된다. 이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중 어려운 내용의 문서를 읽고 이해해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2.4%에 불과하다. 참고로 노르웨이는 이 비율이 29.4%에 달하고, 우리보다 문맹률이 높은 미국조차도 19%에 이른다. 한국은 읽을 줄 알되 이해할 수 없고 눈을 떴으나 눈 먼 자들의 나라다. 이는 우리의 주입과 암기 위주의 입시교육이 낳은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똑똑한 민중을 원치 않는다. 많은 이들이 주입식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우리 교육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전환하기를 바라지만, 권력의 입장에서 이는 무서운 결과로 귀결된다.
눈 먼 자들의 세상에서 소수의 눈 뜬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리더로서의 권력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국가와 행정의 많은 정보들이 국민에게 공개되지 못하고, 지방의회를 출입하는 데도 출입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웃지 못할 사례들 역시 어쩌면 이 공포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상황은 리더조차 눈 먼 사람들일 때 생겨난다. 가난한 아이들이 먹는 1460원짜리 끼니를 본 적 없는 리더를 가진 사회는 비극적이다. 오름의 곡선과 출렁이는 갈대밭을 보지 못하고 몇 개의 수치로 드러나는 국제회의 유치 실적만 읽을 줄 아는 리더를 가진 제주사회는 또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