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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1월의 휴먼라이브러리] '더불어 숲'을 꿈꾸는 한의사, 김수오







  • 2016년 1월의 휴먼라이브러리] 제주의 약손, 늘푸른경희한의원 김수오 원장님

     

          

    '더불어 숲'을 꿈꾸는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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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이로움과 편안함'



    김수오 원장님을 만난 느낌입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연구원 생활을 하다 다시 한의대에 입학.

    고향을 떠나 육지에 살면서도 제주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멈추지 않았고

    귀향해서도 강정의 주치의이자 여러 제주인의 건강을 살피는 제주의 약손.



    새해 기록적인 폭설이 지나간 겨울저녁,

    따뜻한 한방차와 함께한 원장님의 인생여정,

    여러분도 같이 만나보실까요?





     

     

    - 일          시 : 2016121() 저녁 730

    - 장          소 : 늘푸른경희한의원(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과원북429)

    - 함께한 이들 : 김영숙, 김홍구, 윤양선 회원님과 사무처 식구들

    - 기          획 : 김미정 시민사업국장

    - 글   /   사진 : 박유라 간사

     



     

     

    - 제주가 고향이지만, 육지에서 생활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주에서 한의원을 개원한 지 얼마나 되신 건가요?

    - 육지에서 진료하다가 제주로 귀향해서 한의원을 개원한 지는 3년 반 정도 됩니다.

       20128월 제주도로 한의원 물품들을 내려보냈는데

       제주를 강타한 태풍 볼라벤 때문에 개원날이 늦어진 기억이 생생하네요.



    - 전자공학 분야에 근무하다가 한의학을 하셨는데, 애초 학창시절의 관심분야는 무엇이었나요?

    - 고교시절에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분야에 흥미가 있었어요.

      '대학에서 뭘 전공할래?' 물으면 제 대답은 물리학'이었어요.


      3 겨울 대입원서 들고 상경하기 직전, 제사집에 갔다가 서울에서 대학교수로 계신 친척분을 뵙게 되었는데,

      그 분께서 '물리학은 경제적으로 여유있어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데...'라며 형편을 걱정하시더니,

      관련분야로 '전자공학과'를 추천해 주시더군요.


      그렇게 얼떨결에 전자공학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20대를 자연과학이 아닌 공학과 함께 보내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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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오 원장님과 함께한 휴먼라이브러리

       

     


    - 첫 대학 시절 생활은 어떠셨나요?

    - 최첨단 분야를 배운다는 설레임 같은게 있어서 나름 긴장도 되고 어려운 내용을 배워나가는 즐거움도 있었는데요,

      그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마음은 많이 무겁던 학창시절이었죠.

      학교내에 최루탄이 자욱한 날이 많았는데 공대 수업은 강도높게 진행되어

      몸은 강의실에 마음은 강의실 밖으로 떠돌아 다니곤 했어요. 


      저랑 같이 입학한 제주출신 동기들이 백 여명 되었는데,

      그 중 절반이 일년간 기숙사에 같이 살면서 고향 동기들 간에 우정이 많이 돈독했어요.

      2학년이 되면서 친구랑 같이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는데, 이때부터 제 자취방은 제주 동기들의 사랑방이 되었어요.


     ‘순이삼춘을 친구들과 은밀하게 돌려 읽으며 4.3의 비극을 알게 되었고

      5.18 광주의 비극에 제주 4.3 의 한이 오버랩되는 아픔을 공유하면서 우정도 깊어갔어요.

      그렇게 낮에는 수업강도가 빡센 공학도로,

       밤에는 친구들의 하숙방 주인장으로 대학시절이 흘러갔죠.


      학년이 올라가면서 제 자취방에서 며칠 묵었다 간 친구들이

      하나 둘 신문지상에 구속자명단에 이름이 실린채 사라지는 슬픔도 숱하게 겪고...

      그러던 중 87년초 기숙사 동기였던 박종철 학우가 고문으로 죽임을 당하고

      이후 6월 민주항쟁까지 질풍노도같은 시간이 흘렀죠.




    김수오원장_1.png- 암울했던 그 시절에 개인적인 우여곡절은 없었나요?

    - 87년 6.29 항복선언 이후 세상은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게 된 설레임 속에 바쁘게 돌아갔고, 저도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러던 가을 어느날 신새벽, 

      서너명의 괴한들이 자고 있던 저를 끌고가 검은 세단에 태우고 협박을 했어요.


      수배되어 도피중인 친구에게 돈을 송금해준 기록을 보여주며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해서 취조하겠다고.

      당시 대학생이면 누구나 한 두권은 갖고 있던 사회과학서적을 빌미로 구속시켜서 종철이처럼 고문하겠다는 협박에 그저 벌벌 떨리더군요.

      이틀간의 시간을 줄테니 친구와 관련된 정보만 알아봐주면 봐주겠다는 말과 함께 풀려났어요.


      극심한 공포로 속이 다 타들어간 이틀 후, 

      그들을 마주한 순간 '그래, 나 잡아가라고!' 무섭게 오기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그제서야 그들이 없었던 일로 하자고 수습을 하더군요.


      그때가 마침 추석 즈음이었는데,

      탈진한 상태로 무작정 제주도 집으로 내려와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오름에 오르면서,

      내 고향 제주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롭구나 절감했어요.


                                              '아, 내고향 제주가 치유의 섬이구나.'

                                              청운의 꿈을 품고 육지로 떠났던 이십대 청년에게 제주가 새롭게 각인되었어요.

                                              그들이 남긴 상흔이 내게 준 선물이었죠.

     

     



    - 그래서 학교에 머물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나요?

    - 이후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게 되었어요. 장학금을 받고다닌 대가로 LG중앙연구소에 근무하게 되었죠.

      연구소를 택하면 병역특례기간인 5년간은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했어요.

     

      

    - 그렇게 안정적으로 다니던 연구소를 나와, 다시 대학에 들어가 한의사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결정적 계기가 있으신가요?

    - 연구소에서 컴퓨터 관련 개발업무를 5년여 하면서
    나름 보람도 느꼈지만 행복하진 않더라고요
    .

      특례기간이 끝날 즈음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뭘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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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엔지니어로 살아갈 것인가.

      전자공학을 선택한 것도, 엔지니어로서의 삶도 진정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에 의해 선택되어진 느낌이랄까요.

     

      당시 연구소 생활을 하면서 몸이 많이 상해있던 터였습니다.

      만성위염에 알려지비염이 점차 심해져 일년내내 양약을 달고 살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약과 동양적인 섭생법을 통해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관련분야 책을 읽다보니 

      한의학 이론 속에 내가 좋아했던 물리학을 포함한 자연과학이 보이더라고요.

     

      서른즈음의 그해 겨울.

      어쩌면 내가 원하는 삶은 한의학 속에서 찾을 수 있겠구나 기대감이 움트기 시작했죠.  

     

     

    - 아무리 그래도 주변에서는 다시 대학입시부터 시작하려는 것에 대해 말렸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돌아보면, 연구소에 병가를 내고 한의대 입시 공부를 하던 100일간의 시간이 꿈결처럼 평온했어요.

      새벽에 요가 수련을 마치고, 관악산 등산해서 도서관 들어갔다가

      밤10시 도서관 소등할 때 경비아저씨랑 인사나누고 밤길 걸어하루 일과 마무리.

      마치 산사에서 수행하듯 평온한 나날이었죠.


      그렇게 백
    일간의 병가 마지막날
    , 93년 여름 수능시험을 보고 연구소에 복직을 했고,

      이듬해 봄 드디어 한의대에 입학했죠. 이른바 수능1세대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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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신문에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김수오 원장님의 이야기



     


    - 30대에 다시 한의대에 입학하셨는데요, 적응하느라 힘들지 않으셨나요?

    -

    한의대에 입학해 보니 신입생 80여명 중에 나이로 제가 열 번째였고,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수두룩했죠. 그러니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참 많았습니다.

      교양과목 강사가 한의대 신입생의 후배인 경우도 있고...

      그 강사는 수업 내내 진땀 좀 뺐을 거에요.


      한의학에 매료된 다양한 이들이 모인만큼 재밌고 즐거운 학창시절이었어요.

      물론 본과로 들어간뒤엔 양방과 한방을 병행해서 수업듣고 시험치르는게 쉽지는 않더군요.

       

     

    - 서울에서도 '제주'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으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 처음 서울로 입학해서 순이삼춘을 통해 제주의 아픔을 느낀 뒤로

      '제주'는 제 인생 또 하나의 축이 되었어요.

      대학시절 향우회 선배들과의 인연이 이어져 직장생활하면서

      제주사회문제협의회 간사로 활동하게 되었어요.


      제사협은 876월항쟁이후 민주화 흐름중에 만들어진 모임으로,

      현기영선생님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선후배 제주인들이 평소 친목도 도모하고

      4.3의 명예회복과 제주의 중요 현안에 보탬이 되도록 서울지역에서 여러 활동을 했죠.

     

      추운 겨울밤 강요배 선배님의 시골 농가 작업실에 모여 4.3연작 작품 감평하며 밤새 막걸리잔 기울이다

      현기영 선생님과 나란히 흰눈 위로 오줌발 날리던 그 달밤 풍광이 생생히 기억나네요.


      4.3추모제, 송악산 군사기지반대, 탑동매립 반대운동 등 고향 제주에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제사협 간사로서 제주향우회장단들과 동고동락하며 선후배 간의 교량 역할을 수년간 하다보니

      재경 선후배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마당발이 되었더군요.

     

     

    - 제주에 돌아와서도 강정마을에 진료를 다니시는 등 활발히 활동하셨는데..?

    - 4.3이 명예회복되고 제주의 오랜 아픔이 치유되나 싶었는데,

      어느날
    강정마을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아팠어요

      제주로 한의원을 옮기자마자 제일 먼저 강정마을로 달려 갔습니다.


      공권력에 의해 마을공동체가 파괴되고 몸보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마을삼춘들께

      제가 그나마 나눌 수 있는 건 침치료 뿐이라서,

     
    한의원 진료마치면 저녁에 강정마을로 달려가곤 했죠.


      눈내리는 밤 천막에서 침치료 마치고 화목난로에 감귤도 구워먹고....

      그렇게 야간진료 마치고 인적 끊긴 한라산을 넘어오다

      칠흑같은 밤하늘 쏟아지던 수많은 별빛들도 하염없이 감상하고...


      강정마을이 제게 준 행복한 순간들이었죠.





    제주로 한의원을 옮기자마자 제일 먼저

    강정마을로 달려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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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정평화대행진의 든든한 주치의, 김수오 원장님





    - 결국 지금까지의 선생님 인생은 내 자신의 '행복'을 찾아 헤맨 긴긴 여정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





    제 인생을 되돌아 보면 물리학을 좋아했지만 전자공학도의 길을 걸었고,

      엔지니어로 지내다 한의학도의 길로 접어들었잖아요.

      이른바 잘 나가는 분야에서 이십대 시절을 보내면서

      잠시 보람이나 즐거움은 있었지만 행복하다는 느끼진 못했어요.

     

      '나는 언제 가장 행복했나..?‘ 반추해보니 사람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지내던 순간들이더군요.

      자취방에 지쳐 찾아든 친구들 먹여주고 챙겨주던 날들..

      제사협 모임에서 선후배들과 어우러질 때도 챙길때도 그렇고..

      강정마을 삼춘들과도 그렇고..

      같이 어우러지며 정을 나누는게 즐겁고 행복했던거 같아요.


      어쩌면 어릴적부터 보고 자란 제주인의 수눌음 문화가 저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주사람만의 그 배지근한 정서 있잖아요.

     


    -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종일 한의원 안에서 생활하시는 거잖아요. 가끔 답답하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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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한번도 답답하다고 느낀 적 없어요^^.


      진료하면서 환자분들과 얘기 나누며 진료하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요. 

      간혹 진료하느라 피곤하면 잠시 편안한 음악도 듣고.. 읽고 싶은 책도 골라 읽곤 해요.

      제 한의원이 제겐 가장 편안한 공간이네요.

     




     - 한의원이 마치 도서관과 미술관을 합쳐 놓은 느낌입니다. 왠지 참 편안하네요!

    - 제가 과거에 제가 많이 아파봤기 때문에 병원에 갈 때마다 느낀게 있었어요.

      병원이 편안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몸이 아픈 것도 고쳐야겠지만 마음도 다스려주는..

      그런 의사 그런 병원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병원에서 환자분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사 자신이 먼저 편안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곡들을 골라서 틀고 대기실 공간도 제가 좋아하는 책들과 사진으로 채웠죠.

      어때요, 이만하면 편안하시죠^^

     

     

    -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들이 한의원 곳곳에서 눈에 많이 띕니다.

    -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입니다.

      대학 동기였던 박종철 친구가 고문당해 죽고 6월항쟁의 희생에도 군사정권이 이어지던 시절,

      오랜 옥고에서 피어난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저에게도 많은 위안을 주었죠.

     

      유유히 흐르는 깊은 강물같은 서화와 글들은 저에게 아낌없이 주는 큰 나무입니다.

      그때의 첫 마음을 잊지않으려 제 노동의 공간 곳곳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서화를 놓아 두었어요.

      저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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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오 원장님이 좋아하는 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





    - 원장님은 오름도 많이 다니고, '사진'에도 일가견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친한 분들 중에 사진하시는 분들도 많으시고..

    - 진료를 마친 주말 오후, 혼자 오름에 올라 해지는 풍광을 바라보곤 합니다.

      저물녘 부드러운 곡선의 오름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몸과 맘의 피로가 모두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그 느낌이 좋아서 어느날부터인가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죠.


      제게 카메라는 어쩌면 홀로 산길 다니는 제 길벗이라고나 할까요.

      그러고 보니 사진 셔터를 누르며 카메라랑 대화를 하는 기분이 들어요.

      '햐 진짜 아름답다~ 그치? 너도 한 번 봐봐~' 이런 기분이랄까요 ^^


      솔직히 제 절친 강정효 민예총 이사장처럼 사진을 잘 찍진 못해도, 제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내 발로 음미한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을 기록해둔다는 의미가 크니까,

      대부분의 사진들은 열어보지도 않은채 외장하드 깊숙이 간직되고 있죠.


      언젠가 꺼내 볼 날이 있겠죠.

      그때쯤엔 잃어버린 추억의 풍광이 아니길 바랄 뿐이죠.

     

     

    - 지금 인생에서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
    유년시절을 제주에서 자라, 연어가 회귀하듯 불혹 넘긴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제주가 참으로 소중한 보물섬이구나 절감합니다.

      아울러 이리도 소중한 제주땅을 지키는 분들이 하나 둘 모여 숲을 이루는 모습이 반갑고 고마웠구요.


      동의보감에 보면 소의(小醫), 중의(中醫), 대의(大醫)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의는 병을 고치는 의사, 중의는 사람을 고치는 의사 그리고 대의는 사회를 고치는 의사를 말합니다.


      비록 대의는 못 되더라도 병보다 사람을 고치는 중의로,

      마음으로 몸을 고치는 심의(心醫)로 나이들어 갔으면 좋겠네요.

     





    유년시절을 제주에서 자라, 연어가 회귀하듯 불혹 넘긴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제주가 참으로 소중한 보물섬이구나 절감합니다.





     

    - 마지막으로 우리 단체에 바라는 점은 없으신가요?

    - 지금 제주는 그 어느 시기보다 한 해가 다르게 무섭게 급변하고 있는데요,

      난개발로 천혜의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돈의 논리로 제주의 정체성 자체가 사라져가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픕니다.

      이러한 시기에 제주참여환경연대가

      제주의 참 가치와 다양한 제주인들을 아우르는 큰 숲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뿌리깊은 나무가 되어 그 숲에 함께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분들과 즐거운 대화 나눴네요.

      덕분에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밤길 편안히 돌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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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힘들 때,


    한번 쯤 원장님의 한의원에

    노크해 보는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