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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의 휴먼라이브러리_제주 평화나비 김광철 대표]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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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2월의 휴먼라이브러리] 제주 평화나비네크워크 김광철 대표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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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나비네트워크'아시나요?




    평화나비네트워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 동아리 네트워크입니다.

    제주에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평화나비 네트워크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작년 12월에는 평화나비네트워크 친구들이 한라대 앞 방일리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억인 서명운동과 나비기금 모금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등
    평화를 위한 작은 날갯짓을 하고 있는 제주 평화나비네트워크 청년 활동가들!


    올해는 '한일위안부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제주행동'을 결성해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화를 위한 기금모금과 수요 문화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 열정으로, 바른 생각과 앞선 실천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 평화나비 네트워크 in 제주..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볼까요?




     

      

    - 일          시 : 2016년 226(금) 오후 5

    - 장          소 : 예술공간 오이(제주시 삼도2동)

    - 함께한 이들 : 김소운, 유현정 회원

                        제주 평화나비네트워크 김광철 대표, 이주리 활동가,  한수원 활동가

    - 기          획 : 김미정 시민사업국장

    - 글   /   사진 : 박유라 팀장

     

    * 인터뷰는 제주 평화나비네트워크의 김광철 대표와 진행되었습니다.






     

    - 평화나비는 말 그대로 '네트워크'더라고요. 평화나비가 제주에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합니다.


    어느날 페이스북을 보니  '평화나비 페스타'라는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행사가 있더라고요. 거기에서 깜짝 놀랄만한 경험들을 했어요. 한 연극 배우가 나와 할머니들의 경험을 독백으로 담담하게 표현해 내는데, 너무 끔찍하더라고요. 다 울음바다가 될 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나서 '무얼 하는 동아리인데 이런 행사를 할 수 있나'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짜고짜 그날 밤에 실무진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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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평화나비네트워크 김광철 대표와 함께한 휴먼라이브러리




       알고보니 행사가 있던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라고 해서 처음 위안부 문제를 세상 밖으로 내 놓은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를 기리는 날이더라고요. 한창 TV에 일본이 '위안부 문제는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을 내밷는 걸 보고,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 내가 위안부였다. 명백히 증인으로 있다" 처음으로 밝히셨어요. 그날 그 용기있는 고백을 기리는 날이었더라고요.


       간사분을 만나서 평화나비는 어떤 동아리고,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자세하게 물어봤어요. 물론 '제주도에서 해 보겠다, 해 보자' 약속을 하고 내려왔죠. 저희가 약속을 지키게 되면서 서울에 이어 두번째로 평화나비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서울권 네트워크가 전국권 네트워크로 변한 것이지요. 이후에 인천이 8번째, 원주가 9번째 해서 9개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강원도까지 생겼으니, 평화나비네트워크가 전국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 평화나비 페스타에 게 활동이 계기가 됐다고 했는데, 어떤 생각으로 서울까지 가서 참여하게 된 건가요?


    - 정말 우연히 평화나비 페스타에 관한 내용을 페이스북에서 봤어요. 마침 8월 15일 즈음 해서 서울에 올라갈 일도 있었고요. 그래서 참석하게 되었는데, 되게 참신했어요. 대학생들끼리, 또는 일본 오키나와 사람은 물론 재일 동포들과 함께 토론도 하고 저녁에 페스타를 열어서 김제동씨가 사회를 보고.. 좀 특이하게 느껴져서 이걸 한번 가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마음이 동해서 '이런 것을 제주에서 해 봐야 겠다'라는 생각을 이어 직접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 그럼 본인이 직접 제주지역 평화나비네트워크를 꾸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처음부터 대표를 하지 않으신 건가요?


    - 처음부터 대표를 할 생각은 없었어요. 같이 하는 거 자체가 중요하고, 후배들이 대표직이라는 걸 맡으면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그 와중 좀 특이한 후배를 만났어요. 이 친구가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나비 배지 파는 걸 보고, 그냥 찾아갔죠. '너 이거 관심있는거 같은데 평화나비를 아냐...' 고 물었더니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인연으로 함께하게 된 이 친구, 무척이나 열정적이더라고요. 그래서 대표로 추천을 했어요.


      이 친구가 대표가 되어 작년 평화나비 제막까지 함께했고요. 그 친구 임기가 끝나고 한라대 친구가 대표가 되었는데, 개인적 사정으로 대표가 공석이 되는 바람에 제가 이번에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올해 2월 14일부터 대표직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지금 제주 평화나비는 몇 명이서 활동하고 있나요?


    - 저희가 최근에는 10명 정도 됐는데, 또 다시 조정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장 최근 집계는 10명 정도 입니다. 행사를 열 때는 서포터즈가 함께하니 70여 명으로 올라가기도 했다가, 행사 정리되고 일반 회원으로 30명 정도 남았다가 그런 과정을 겪어요. 



    - 제주 평화나비 네트워크가 2014년 이후로 활동이 참 많았더라고요. 주로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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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희가 작년에 평화나비의 흐름을 한번 싹 가져와 봤던 건데, 돌아서서 평가하면 참 힘든 과정이었어요. 
    너무 힘들게 하면, 같이하는 친구들이 힘들어 한다는 것도 깨닫게 해 준 한 해 였습니다.


       2015년 3월에 평화나비 콘서트라는 걸 대학에서 열었어요.

       '위안부 문제로 콘서트를 열겠다, 찾아와라', '이 콘서트의 수익금으로 제주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겠다' 이런 취지로 3월에 콘서트를 열었고, 실제로 400여 명 정도가 찾아왔어요. 김복동, 길원호 할머니가 내려 오셔서 발언과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 이후엔 '역사기행' 활동을 이어나갔어요. 

       위안부 문제가 일제 강점기 때 시작된 것이라면, 그 근원적인 현실을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그 이후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역사에 대해서 알고, 나의 뿌리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래서 평화나비네트워크 전체가 5.18 광주기행 '기억의 봄 프로젝트'이라는 역사기행을 진행했어요. 광주로 직접 올라가서 광주를 기행했습니다.


       8월에는 직접 서울로 올라가 '평화나비 페스타' 행사를 함께했고요. 저희가 평화나비 콘서트를 하면서 올해 안에 평화의 소녀상을 짓겠다고 약속을 한 바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8월 페스타가 끝나고, 9월에는 평화나비 소녀상 건립을 위한 활동에 들어갔지요.


       기존에 콘서트를 열었을 때, 각 단과대 친구들과 추진위원회(30여 개 단과대 및 학생회 참여)를 만든 바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콘서트 추친위원회를 평화비 건립 추진위원회로 전환시켜서 기존에 있는 학교에 친구들을 더 모아냈어요. 나중에는 50개에 가까운 학생회들이 모여서 건립 추진위원회를 바탕으로 분담금도 모으고. 그 외에는 시민사회단체의 도움도 되게 많이 구했고요. 도의회 의원, 교육청도 찾아다녔습니다.



    - 소녀상을 일본 영사관 앞이 아닌 인근의 방일리 공원에 건립했습니다.

      장소를 선정할 때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어떻게 이곳으로 낙점하게 되었나요?


    - 저희가 처음 부지로 선정한 곳이 일본 영사관 앞이었어요.

      영사관 앞에 짓는다는 건 정말 큰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습니다. 이걸 관할하는 부서가 시청의 도시디자인과였는데, 여기에서 극구 영사관 앞에는 세울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어요. 10번 정도 만난 뒤에도 변하지 않더라고요.


       워낙 답답해서 대사관에 저희가 면담 요청도 했었는데, 물론 거절은 당했습니다. 도시디자인과에서는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어요. 결국 하나의 길만 고집하지 않고 대체부지에 대한 논의도 함께 하기 시작했어요. 도시디자인과에서는 대체 부지로 사라봉은 어떠냐, 조천 만세동산은 어떠냐 제안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설명을 드렸어요. '그냥 소녀상을 보고 지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가 왜 이걸 세우려고 하는지, 소녀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 드려도 '행정의 어려움을 이해해 달라' 이런 정도로 소통이 안 되었어요.


       대체부지를 논의하는 와중에 '그 근처에 다른 공원도 있는데..'라는 말이 나온거에요. 실제로 그 주변을 살펴보니까 방일리공원 근처에 대학, 도서관, 중학교, 고등학교가 다 있더라고요. '대체부지를 찾는다면, 여기여야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주시에서 안 된다고 하니까 대책회의를 열었어요. 도지사를 만나 보자라는 이야기도 나왔죠. 2주 동안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3번에 걸쳐 1인 시위를 했어요. 그때가 11월 중순이었는데, 어떤 때는 소녀상의 한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서 시위를 벌이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어요. 시위도 하고, 서명도 받았습니다. 짧은 시간인데 1000명 넘게 서명해 주기도 했습니다.


       평화나비 회원들이 도지사에게 엽서를 쓰기도 했어요. 엽서를 모아서 도지사에게 전달하는 과정들이 있었어요. 딱 2주 후에 답변이 왔는데 '바빠서 못 만나겠다' 였어요 이유가 너무 바쁘다.. 라는 답변이 돌아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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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한걸음, 한걸음




       그래서 다시 회의를 했어요. 끝까지 싸우거나 대체 부지로 돌리거나 하는 선택의 과정이었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두려움도 있었어요. 대체부지로 돌려버리면 우리가 왠지 물러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게 되게 당당한 일인데 우리가 괜히 지는 느낌이 들어 부담감이 되게 컸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이하 '정대협) 윤미향 상임대표님이셨어요.

       서울에서 만나 저희 사정을 이야기하니 대표님이 '영사관 앞에 세우려면 너희 힘만으로는 안 되겠다, 시민사회단체가 모두 결합을 해야되지 않겠냐...' 고 말씀해 주셨어요. 근데 그 당시 민중총궐기 등 많은 일들이 있어서 고민이 또 되더라고요.


       근데 또 그때가 마침 할머니들이 아프셔서 수요시위를 못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어요.

       '할머니들이 많이 편찮으시다. 너희 뜻을 관철시켜 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건립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할머님들이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건립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라는 말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약속한대로 올해 대체부지를 찾아서 소녀상을 건립해 보자'로 의견이 모아지더라고요. 바로 대체부지에 짓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협의가 극적으로 이루어졌어요.



    - 아쉽지만, 한 고비 넘겼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아요.


    - 근데 막상 협의를 마치고 보니까 돈이 없는 거에요. 당시에 1200만원이 있었는데, 소녀상 세우려면 3300만원이 필요하더라고요. 학생들만의 힘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해서 '도민사회 여러분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희가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소녀상을 세우려 합니다'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언론이 취재를 해서 TV에 나가고 나니까 열기가 올랐는지 굉장히 많은 후원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어떤 분은 익명으로 500만원을 후원하기도 하시고..


       이런 과정들을 거쳤어요.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세우는 평화비'였는데, 비문에 문구를 하나 더 채워 넣게 되었지요. '제주의 평화시민과 함께 세우다' 이런 식의 비문을 추가했어요. 청소년 후원도 많이 왔구요. 의정부에서 후원해 준 청소년, 해외에서의 후원도 있었어요. 어쩌다보니 세계인의 평화비가 된 것이었죠. 이렇게 기적적으로 일주일 정도 앞둔 상황에서 3000만원 정도의 돈이 모아졌어요.




    한라대 앞 방일리공원서 평화비 제막식_대학생이 만든 평화비 서울 이어 두 번쨰.jpg

                          ▲ 전국에서 두번째로 '대학생이 세우는 평화비'를 건립한 제주평화나비!




       거기서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작가님들이 '너네 수고가 참 많았다, 학생이니까 이 정도만 내' 라고 한게 2000만원 정도였어요. 제막 비용까지 제하고 나니까 저희가 딱 730만원 남더라고요. 남은 돈은 유지보수비용으로 200만원은 남기고 나머지 돈은 기부하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할머님들이 만드신 나비기금에 530만원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기부했어요. 윤미향 대표님도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불과 그 다음날 저녁에 위안부 협상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28일날 한일 협의가 보도되기 시작했어요. 그런 참 안타까운 일들이...



    - 그래도 소녀상 건립이라는 하나의 큰 목표가 이루어 졌잖아요.

      막상 소녀상을 건립하고 나서, 성취에 대한 허탈감 같은 건 오지 않던가요?

    - 저는 전혀 없었어요. 

      그냥 저는 끝나고 났는데, 뭔가 큰 일을 했다는 생각보다는 '이제 시작이다'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 한일협정 이후, '제주행동'을 꾸렸다고 들었습니다.

    - 한일협정이 터지고 1월 14일에 정대협을 포함해서 300-400개 전국의 시민.사회.학생단체가 모여 전국 시민행동을 꾸렸어요. 그렇게 '한일위안부 합의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이 첫 회의를 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일 합의를 무효화하자.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게 만들어 출연하겠다는 100억원을 국민성금으로 만들어서 일본이 주는 돈 받지 말자! 우리가 무효 선언을 하자!'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실질적인 일들이 이뤄지더라고요. 재단설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4월에 정식 재단 설립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희는 여기에 평화나비네크워크 차원에서 참여를 하고 있는데, 할 수만 있다면 제주에서 제주행동을 꾸려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안서를 내서 시민사회학생단체가 모이게 되었고, 모인 분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했어요. 다음모임을 해보자 라는 결론이 도출됐고, 정말 많은 단체들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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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여성단체에서는 거의 모두가 참여를 해 주셨습니다. 두 번쨰 모임에서는 '회의를 할 필요 뭐 있나 준비위원회 하지말고 바로 하자'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어요. 되게 조심스럽게 접근했었는데, 바로 제주행동이 꾸려져서 상임대표단체 5개와 17개 단체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저께부터 귀향 상영관에서 캠페인을 시작했어요.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모금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귀향이 개봉하는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한 시기기도 하니까 해 보자고 제안을 했어요.바로바로 당번을 나눠서 오늘은 저희가 하기로 한 날입니다.         

     


    - 꾸려진 재단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 1년치 목표를 정했어요. 3월 8일까지 1차 모금, 8월 15일까지 2차 모금, 12월 28일 3차 모금. 1년 동안 100억원을 모아보자.. 이게 목표입니다. 액수가 좀 많아보이기도 하지만, 100만 명이 만원씩 내면 가능한 모금액이에요.


      또 하나 정리된 것은 매주 '수요일'에 캠페인을 하자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주 수요일에는 제주행동 단체들이 집중을 해서 해보자.. 이런 정도가 지금 정리가 된 상태입니다.



    - 열정이 참 대단한 것 같아요.

    - 약속을 했으니까, 지켜야죠.



    - 그 열정은 어디서 나오나요? 도대체.


    - 저도 사실 되게 모범생이었어요. 대학교에 오자마자 교육공동체에서 활동했는데, 거기에 머리와 발이 정말 가까운 형을 만났어요.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형이었죠. 이 형이랑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도 잘 몰랐어요. 따라다니기만 하고... 그런데 어느날 후배들과 평화나비 활동을 하면서 돌아보니 어느샌가 '내가 이 형을 닮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희가 처음에 평화나비를 하면서 생각한 게 '백번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몸으로 느껴보자'였어요. 그래서 결성 되자마자 친구들과 바로 서울로 갔습니다. 저희 첫 모임이 8월 27일이었는데, 일곱 명 비행기표를 바로 끊어었어요. 모두가 뜻이 맞아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9월 첫 주에 학교 오리엔테이션은 참석 못하고, 서울에 2박3일동안 가 있었어요. 거기서 할머니들을 수요시위에서 만나고, 발언하고, '저희 제주에서 평화나비 활동을 할겁니다' 약속을 해 버렸죠. 바로 윤미향 대표님을 만나서 전쟁과 여성인권 관련 박물관을 관람하고 간담회도 하고, 책도 받고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제주에서 평화나비 활동을 할 것이라고 하니, '그래, 그럼 내가 할머니들을 모시고 내려갈께' 윤미향 대표님이 바로바로 결정을 해 주시더라고요. 일이 곧바로 진행되었어요. 10월 초에 진짜로 할머니들이 오셨거든요. 세미나실 잡고, 전시 부스를 만들어서 할머니들이 내려오시니 함께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홍보를 시작했습니다.


      혼자만 한 게 아니라, 후배들도 열심히 도와주고 할머니들도 내려와 주시고, 정대협에서도 도와주셔서 열정이 막 살아났어요. 2014년 한 학기에는 우리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거리에서 캠페인은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무슨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한마디 한마디 늘어서 지금은 위안부에 대해서 물어보면 '이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설명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시작했던 게 2015년에 콘서트로 터졌어요.


       사실 우리도 누가 콘서트를 열어봤겠어요. 기획은 누가하며, 프로그램은 누가짜면 고민을 했는데 다 역할분담을 해서 했어요. 정말 기적처럼 '못하겠어요, 못하겠어요' 하던 친구도 갑자기 몰입하더니 2주만에 해내고... 이런 것들이 이어져서 콘서트가 열리게 됐어요. 힘들었어요. 지금은 사실 좋은 모습만 이야기하지만, 뒤에서는 정말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어요.



    - 한수원 활동가는 어떻게 평화나비네트워크에 합류하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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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2학기부터 함께하게 되었습니다.무조건 해야되... 이런 생각보다는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함께하게 되었는데, 저의 대학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활동이 되어버렸습니다. 2015년 8-9월 즈음. 평화비 세우는 걸 함께했죠. 처음에는 이렇게 큰 일을 하는 동아리인줄 몰랐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했는데, 선배들이 너무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저도 큰 자극을 받았어요.


    - (김광철 대표) 저희가 평화비를 세우고 나니까 회원들이 많이 지치기도 하고, 지금은 소강상태인데 끝까지 남아서 함께하고 있는 친구 중 하나입니다.




    - 대표님은 이제 졸업반이라고 들었니다. 요즘 청년들의 영원한 숙제, 취업걱정은 안 되시나요? 


    - 저는 '보물섬'이라는 대안학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졸업해서도 거기서 일할 예정입니다. 일한지, 5년 됐어요. 학교를 만들 때 함께한 창립멤버이기도 해요. 내년에는 고등부까지는 아닌데, 청소년센터까지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반일제를 해서 점심 먹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는데, 올해는 조금 더 집중해서 삼일 전일하고, 이틀 반일하는 일정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 그럼 학업과 대안학교 교사 일을 병행해 온 거네요?


    - 어떤 때는 제가 교과전담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토요학교 대표교사로 주말에만 하기도 하고, 그런 절차들을 거쳤어요. 처음 학교 설립하고는 생활교사로 1년 반을 함께하다가 복학을 해서는 여러 형태로 있다가 중등이 생기고 나서는 확실히 교사가 필요하다보니까 제가 중등으로 결합이 되어서 일하고 있습니다.



    - 요즘들어 제일 고민되는 게 있다면?


    - 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 하면, 욕은 안 먹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욕을 먹더라고요. 범위도 넓어요. 이 활동을 지켜보는 다른 친구들일 수도 있고, 누가 됐든 욕을 하더라고요. '왜 그러지?' , 그리고 난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관계에 대한 문제들이 고민이에요.


       평화나비를 하면서 벽이 있는 관계를 '다 허물어보자, '타인이 아픔을 같이 느껴보자' 라는 그 힘으로 콘서트까지 이어오고, 작년에는 힘이 소진될 때까지 온 것 같거든요. 근데 어떤 친구들은 이런 관계에 대해서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더라고요. 개인적 가치관과 공동체의 가치관의 충돌을 경험했어요. '아무리 평화나비 활동이 중요하긴 하나 내 개인적 가치를 넘어설 수 있나..' 이럴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친구들이 결국에는 헤어져버리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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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한 김소운, 유현정 회원과 한수원, 김주리 활동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게 저의 고민이에요. 지금 제 또래나 후배들은 내가 무엇을 주면 돌려줘야 될 것 같은 '기브 앤 테이크'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거 같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뭔가 목적이 있는거야, 뭔가 내가 해야돼', 대화를 하다보면 그런 부담감을 쉽게 느껴요. 근데 저는 보물섬이라는 공간에서 되게 일상화해 온 생활이거든요. 대학 사회를 한번 바꿔보겠다고 해서 와 보고 나니까 제가 보물섬에서 경험한 가치관이랑 여기서 살아가는 가치관이랑 되게 다른거에요. 개인의 가치관과 계속 충돌이 일어나더라고요. 


       근데 '이런 방식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 이게 더 삶의 정수 아니야? 맨날 내 개인만 보고 살아오다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느껴보고 주변을 되돌아보며 살 수 있다는 게 더 행복한 삶 아니야? 물론 바쁘고 힘들기도 하지만'. 이게 한편 설득력을 갖다가도 취업, 상황, 현실에 부딪히면 온전히 넘어서지를 못하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가 고민이기도 하고...


       극복이 되면 평화나비도 스스로 굴러가는 구조가 만들어 질 것 같아요.

       제 삶에서도 큰 고민이에요.


       평화나비를 내 삶에 가져온다는 건, 내 삶을 둘려본다는 뜻이라고 봐요. 평화나비의 성장에서 '성장'이란 내가 평화나비를 위해 한 발 물러설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뒤에서 뭔가 노력할 수 있는 이걸 하자는 건데, 못 받아들이는 친구들이 꽤 많아요. 이걸 좀 바꿔보는 게 저의 숙제 입니다.


       사람들이 '아 저것도 답이 될 수 있어' 가 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고, 모델을 만들어야 되고, 많은 노력을 해야하듯이 평화나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포기하냐, 끝까지 가느냐.. 여기서 판가름이 나는 것 같아요.



    - 평화나비네트워크 동아리방은 따로 있나요?


    - 내일 생깁니다.

      콘서트 할 때, 부탁을 해서 지하방 잠깐 썼다가 6월에 반납하고, 그 뒤엔 한창 전전했어요. 그래도 저희가 처음 시작을 할 때 부터 정식 동아리의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거든요. 이런 저런 인준 과정을 거치다보니 시간이 좀 걸렸어요. 3년차가 되서야 인준이 된 거에요. 정식 동아리가 되어서 동아리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 우리 단체도 '청년'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 말씀 해주세요!


    -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서 행동해야 거기에서 뭔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단지 '시민사회단체에서 왜 안 도와주시느냐' 이것보다는 청년들이 무언가 자발적으로 행동을 하고, 만나서 기획하고 만드는 과정과 행동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청년들 나름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단편적으로 끝나버리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결국 그런 것들을 삶과 행동으로 가져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청년 스스로가 정형을 만들어야해요.

       평화나비도 이런 활동을 하니까 '제주행동'이라는 결과물이 나온 거잖아요. 시민사회단체는 뭔가 지원할 수 있는 건 많이 해주시는 거 같아요. 학생 스스로가 공감하는 단체를 만들어 내서, 시민단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용을 만드는 건 우리니까, 우리가 철학적 고민을 많이 해야될 것 같아요.



       우리가 고민을 찾아야겠지요.


       변화가 있으려면, 대학문화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 같아요.

       멀찌감치 있기보다, 뛰어들어야 할 것 같아요.

       몇 년이 걸리든...







    평화의 소녀상,

    까치발로 앉아 있단 사실 알고 계셨나요?


    까치발을 든 소녀는

    '고향에 돌아왔어도 편히 쉬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은 것 만이,

    소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 주는 일 아닐까요?



    오늘도 소녀상은 그 자리에 앉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를 잊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