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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기사

  • 한미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11시간 전인 4월 18일 오후 6시가 되자 농수식품부 임동석 농업통상정책관은 한미간 쇠고기 협상이 타결되었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당시 한미간 합의된 쇠고기 수입 협상 내용은 1단계로 30개월 미만의 소에서 생산된 쇠고기는 모든 부위가 대부분 전면 수입 허용될 뿐만 아니라 2단계로는 30개월 이상의 소에서 생산된 쇠고기의 수입도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쇠고기 협상아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의 우시장에서 한우 가격은 곤두박질쳤다. 한우농가들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심정을 전했고, 소비자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하지만 지난 대선과 총선을 기점으로 형성된 보수 독주의 분위기 속에 현실 정치는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그런데 도저히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방독주의 물결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장애물에 부딪쳤다.


    지난 5월 초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학원에서 고3학생들과 수학 수업을 진행하는 도중 여학생들끼리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다음 6일에 촛불집회가 예정되었다는데, 거기 갈 거니?"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고 가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넌 어쩌려고?"


    "그날 중간고사 시험이 있어서 우리 학교는 일찍 끝날 거야. 거기에 참석하겠다는 친구들도 꽤 많아. 난 시험공부가 부족해서 갈 수 없을 것 같아."


    학생들 대화 속에 내가 끼어들었다.


    "너희들 촛불집회 열린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니?"


    학생들은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비롯해서 이명박 정부의 각종 정책을 비난하는 내용들이 휴대폰 문자 메시지와 인터넷을 타고 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다고 답했다. 학생들끼리 그런 내용을 문자로 주고받는 가운데 촛불집회에 관한 정보들도 당연 공유된다고도 했다.


    제주지역에서 촛불문화제가 처음 열린 날은 5월 6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청 앞에서 열린 그날 촛불문화제에는 누구보다도 어린 여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여학생들의 열정에 놀란 나는 많은 시간동안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다.


    “대통령은 어른들이 뽑았잖아요. 대통령 잘 못 뽑은 것은 어른들인데, 우리에게 짐을 넘기는 것 같아 속상해요. 과거에는 어른들이 나서서 민주화도 이룩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왜 다 누가 나서주기를 바라는지 모르겠어요. 어른들이 답답해요."


    이 학생은 과거 민주화를 이룬 어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라도 나왔다는 것이다. 고1 여학생이 남긴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촛불이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사법당국은 촛불문화제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사법처리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교육당국도 각 학교에 학생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지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학교 선생님들의 징계 위협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당당했다. 5월 13일 2차 문화제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들에게 있는 겁니다. 국민들은 엄연히 집회와 결사, 표현의 자유가 있는 거잖아요. 우리를 억압하려 하지 마세요.”


    그날 참여한 학생들은 1차 집회 때와는 달리, 경쟁적으로 자유발언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다. 음악과 댄스 그리고 박수와 함성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촛불문화제는 그들을 위한 축제로 자리 잡고 있었다.


    5월 20일에 열린 3차 촛불문화제에는 참여하는 인원 중 학생들의 수는 줄어든 반면, 성인들의 수는 늘어났다.


    광우병 쇠고기문제로 촉발된 촛불정국은 그동안 배후조종의 혐의를 의식해 몸을 낮추고 있던 도내 70여개 사회단체들로 하여금 광우병쇠고기도민대책위를 구성하게 하였다. 대책위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최하고 참여하고 있는 촛불문화제에 소극적으로나마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한편, 제3차 촛불문화제에 참여했던 필자는 행사가 끝나고 열린 이명박탄핵투쟁연대 회원들의 뒤풀이 자리에 초대되었다.


    “<오마이뉴스>가 아니면 이 술자리에 끼워주지도 않습니다. 다른 일간지 기자들도 저희에게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제안했지만 모두 사양했습니다.”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아마추어 시민기자가 본업을 제쳐두고 촛불문화제 현장에 매번 취재를 나간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개인적 처지에도 불구하고 이 회원들은 시민기자 개인과 <오마이뉴스>라는 언론사에게 동일한 수준의 기대를 보내고 있으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5월 24일 열릴 제4차 촛불문화제를 위해 탄핵연대 회원들은 밤새 율동과 노래를 준비했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시민참여는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기자나 시민단체 회원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행사를 주최한 탄핵연대 회원들은 풀이 죽어 있었다.


    “도내 70여개 사회단체가 모여 광우병쇠고기대책위를 꾸렸다고 하는데,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언론은 툭하면 국민들의 냄비근성을 비판하지만, 언론은 벌써 촛불문화제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어린학생과 일반 시민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당일 촛불문화제의 내용보다는 귀가를 미루고 있는 여성회원들 전하는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었다. 그날 작성한 <밤늦게 집 못가는 제주비바리들 “MB, 애 좀 낳자”>라는 제목의 기사는 9000회에 가까운 조회를 기록하며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5월 25일 새벽에 서울 광화문에서 ‘평화시위를 보장하라’는 시민들에게 경찰은 군홧발과 방패로 폭력을 행사했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강제로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당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고시하여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런 당국의 횡포에 시민들은 분노했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주 2회로 열리던 촛불문화제는 거의 매일 열리다시피 했다.


    5월의 마지막 날 열린 촛불문화제에는 주최 측이 준비한 양초 700여개가 금세 동이 나고 말았다. 이날 시민들은 촛불문화제가 끝나자 거리로 나가 ‘고시철회 협상무효’, ‘폭력경찰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6월 3일에 이르자 시민대표 4명이 천막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리고 6월 4일에 촛불문화제가 거의 최초로 정치적 성과를 남겼다. 전국에서 동시에 시행된 재보선 투표에서 한나라당이 완패를 기록했다. 제주도에서도 제주시 삼도・오라 선거구 도의원 선출을 위한 재보선 투표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후보 4명 중 4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했다.


    6월 5일부터 8일까지는 72시간 촛불릴레이가 시작되었다. 저녁에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시민들은 시청어울림마당에 텐트를 치고 영화 <식코(Sicko)>를 보면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한편 6월 7일 행사는 6.15공동선언 8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더불어 열렸다. 마침 기독교계 원로라 하는 사람들이 촛불문화제의 배후에 친북좌파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6.15 기념행사는 이들로 인해 더 빛을 발했다. 남북한 화해와 협력은 민주화를 위해서라도 꼭 이루어야할 과제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6월 10일을 맞았다. 기상청은 6월 10일 저녁에 제주지역에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하고 있었다. 과연 87년 6월 항쟁을 기념할 만큼 큰 그림이 나올지 걱정되었다.


    그런데 6월 10일 당일 낮에 낭보가 전해졌다. 제주지역 35개 단체가 제주시 관덕정에 모여서 <제주도민 비상시국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선언문>을 채택했다. 제주지역의 계층과 시민을 대표하는 단체들은 이날회의를 통해 6월의 광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저녁이 되자 시청 앞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모여들게 했다. 시민들은 어울림마당은 물론이고 시청 앞 3차선 편도 도로를 가득 메웠다. 촛불문화제를 위해 이명박탄핵투쟁연대에서 준비한 양초 1500개는 금세 동이 났다.


    동영상으로 서울에서는 50만 명 이상의 시민이 모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감격에 젖은 시민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21년 전 6월 항쟁의 현장이 재현되는 듯 했다.


    6월 14일은 서울에서 고 이병렬 열사 장례식이 열린 날이다. 이병렬 열사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했던 것일까? 14일 오후부터 심한 바람을 동반하여 내내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가운에 오후 4시경 관덕정에서 열린 농민대회를 시작으로, 저녁 7시에는 제주시청 정문 앞에서 35개 사회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비상시국대회가 열렸고, 8시부터는 이병렬 열사 추모식이 열렸다.


    제주 투쟁을 격려하기 위해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 내려와서 행사장에 시민들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는데, 비옷을 입고 참여한 시민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 비상시국대회부터 강정마을 주민들 다수가 ‘해군기지 반대’ 피켓을 들고 참여하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촛불이 전국을 뒤덮는 상황에 이르자 정부는 쇠고기 고시를 뒤로 미루고 김종훈 통삽교섭본부장을 미국으로 보냈다. 정부는 19일까지 양국간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김종훈은 아무런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특별기자회견을 자처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지 않는 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은 결코 없도록 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강조했다. 그리고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자신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촛불을 바라보았으며,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는 말도 남겼다.


    하지만 반성했다는 대통령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음이 곧 드러났다. 농수식품부 정운천 장관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새로운 위생조건을 담은 고시를 발표했고, 관보에 게재했다. 정부는 검찰, 물대포, 수구언론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촛불에 향해 대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동안 꾸준히 취재해 온 시민들은 그런 수구의 반격에 쉽게 무릎을 꿇을 것 같지 않다. 2008년 5・6월 광장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을 뿐이다. 시민기자가 생업을 걱정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