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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제주범도민회의 입장

  • 제주국제자유도시 플랜이 현재 집권여당 내에서 논의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확정 되지도 않은 '영어공용화론'이 돌출되어 논쟁이 비화되고 있다. 본회는 이 사안이 현재 민주당 기획단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임에 비추어 그 윤곽이 드러날 때 까지는 가급적 입장표명을 자제하기로 내부의견을 모은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이 도 내·외 온라인 공간 뿐 만 아니라, 중앙일간지 및 급기야는 중앙부처 간에도 논란 이 확산되고 있어 더 이상 입장표명을 유보하기 어렵다고 판단, 우리의 의견을 아 래와 같이 밝힌다. 특히 최근 제주도내 일부 언론에서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실상분 석도 없이, 마치 이 사안이 제주국제자유도시의 필수조건인양 도민을 호도하는 보 도를 내고 있는 것도, 우리의 입장 피력을 유도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밝힌다.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실상 분석부터

    우리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검토도
    없이 찬성이니 반대니 하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특히 이는 영어공용 화론을 찬성하는 논자나 일부 언론의 논조에서 두드러지는 데, 이들은 영어공용화 가 국제자유도시의 필수조건이라며,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 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논지의 배경은 현재 제주의 문제는 국제자유도시 만 되면 일거에 해결될 수 있다는 신비화된 국제자유도시 개념에 기반하여 있다. 즉 제주의 비전은 국제자유도시이며 이를 위해서는 영어공용화가 필수조건이라는 식으로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서 국제자유도시 자체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단순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왜 그런지는 아래에서 차근차근 살펴 보겠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용어'란 무엇이며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무 엇인가 하는 점이다.

    '공용어'란?

    공용어란 "한나라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말"로서, 국가(행정, 입법, 사법 등) 가 공적으로 의사를 표현(말, 글)할 때 공식적, 강제적으로 통용이 요구되는 언어를 말한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단지 행정기관의 공문서 외에 입법(지역으로 치면 지방의회) 및 사법기관의 법령 등 공식기록은 물론, 통신·교육·방송 등의 언어로 널리 쓰이는 언어를 말한다. 이럴 경우 행정기관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면, 공문서에는 한글과 영어로 작성하고 영어로 서비스 받고자 하는 민원인에게는 영어로 처리해야 하며, 공무원 선발시험을 영어로 치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영어로 출제해야 한다. 교육 분야에서도 단지 영어교육의 강화라는 측면 외에 영어로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에게는 영어로 가르칠 의무가 발생하는 등 영어가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문광부 자료).

    이럴 경우 쉽게 예측가능한 것은 필요 없는 영어공문을 위해 또는 공무원들이 영
    어공부에 매달리게 되어 발생하는 낭비와 비효율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공무원 사회 내에서 영어 능력에 따라 진급이 좌우되고, 이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사표를 내는 일이 속출할 것이라는 예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지난 96년, 90% 이상이 히스패닉계가 거주하고 있는 미국의 애리조나 주에서는, 애리조나 주가 88년 주민투표를 거쳐 확정한 영어공용화 법안에 대해, '마리아 이니구즈'라는 주 공무원이 주정부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낸 바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영어 공용화 법안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는 주민들의 생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영어공용화가 헌법에서 정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뿐 아니라 주민들의 건강, 생활, 자녀교육에 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어 공용화 법안은 영어가 불편한 학부모들에게 보내는 공문서까지도 일체 영어로만 작성토록 하는 등 주정부는 물론 로컬정부의 업무수행시 영어사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러한 논란이 제주에서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이른바 '기관'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언급했듯이 언론·방송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영어가 공용어이기 때문에 영어판 편집 및 프로그램을 방영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가뜩이나 재정적으로 열악한 도내 언론상황에서 이를 위해 추가로 투입될 비용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더욱 중요한 것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주민과 그렇지 못한 주민간의 사
    회·경제적 격차가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상황이
    다(이는 결론에서 다시 살펴본다).

    외국의 사례 검토

    공용화론을 찬성하는 이들은 걸핏하면 외국의 사례, 그 중에서도 싱가포르와 홍
    콩의 예를 들며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단견적 발상이다. 현재 세계에서 공용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다음과 같은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 째는, 토착어 중 국가 전체의 공통어가 없는 경우로서, 서구 열강의 자의적인 식민지 경계 획정으로 말이 다른 다수의 부족 혹은 종족이 같이 살게 된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이다. 둘째는, 거의 대등한 세력을 지닌 상이한 언어권의 국민들로 나라가 구성된 경우로서, 네덜란드어계와 프랑스어계가 동거하고 있는 벨기에 같은
    나라이며, 셋째는, 영어권 국가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나라로서 홍콩과 싱가포
    르 같은 곳이다. 이 중에서도 싱가포르는 말레이어를 국어로 하고 있으며, 공용어는 중국어, 타밀어, 영어를 복합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다민족 복합사회(중국계 76%, 말레이계 15%, 인도계 7% 등)이기 때문이다.(김상온 국민일보 논설위원)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필리핀, 영어를 14개 공용어 중 가운데 하나로 쓰는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 그러나 이런 나라들은 영어를 훨씬 못하는 일본이나 한국 보다 경제적으로 우수하지도 생활이 국제적이지도, 국민생활이 행복하지도 않다. 이들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택하지 않아 못하는 것이고, 일본이 영어를 공용어로 택해 잘사는 것인가? 싱가폴과 홍콩이 앞서가는 것은 모든 제도가 선진적이어서 그렇지 그 이유가 영어사용에 있는 것이 아니다. 홍콩은 사실상 영국이었기 때문에 영어가 국어였다는 특수상황이었다. 스위스는 4가지 언어를 쓰고 있으며, 한 지역에서 쓰는 언어가 다른 지역에 가면 통하지 않지만 그래도 세계 1위의 국민소득을 자랑했었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 영어사용권인 미국에선 영어공용화법이란 게 없다는 사실이다(언급한 애리조나주 같은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고). 오히려 늘어나는 히스패닉, 아시아계 인구로 인해 이중언어 교육이 활성화되고 있고, 캘리포니아는 공용어로 영어와 스페인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즉 미국 시민들 가운데도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각 주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뉴욕의 선거철에는 모든 뉴욕시민들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된 후보자 약력을 받는다. 만일 택사스나 캘리포니아에서 스페인어를 없애고 영어만 공식어로 채택하자고 주장하는 후보는 절대로 주지사에 당선될 수 없다. 영어(미국어)를 생활화하고, 매년 막강한 예산을 투입하는 미국에서도 영어를 미국 전국민의 모국어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오히려 최근 '영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자국어 보존에 전력하고 있
    다. 될 수 있으면 자국 내에서 영어사용을 제한하고자 노력하고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영미문화제국주의에 종속을 거부하고 자기들이 살아온 방식을 고수하며 프랑스적 가치관에 문화와 관광산업을 육성한 결과 프랑스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관광국이 됐다.(문기성. 미국 워싱톤 거주 제주인) 이렇듯 세계 각국은 자기 말과 글을 지키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세계 역사상 단일민족국가가 스스로 외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나라는 없다는 문광부의 지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어공용화 보다 '좋은' '영어교육이 필요

    그렇다면 국제자유도시를 지향하는 제주도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
    는 세계화 시대에 영어가 필수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주민 모두가 영어를 해야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영어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전문인이 능숙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국제자유도시에 필요한 것은 올바른 법과 규칙이다(홍콩은 '괴롭히는 사람이 없다'는 표현과 같이 부정 부패가 없다. 그리고 여러 가지 세제상의 혜택이 있다. 이것이 바로 국제자유도시의 필수조건이다).
    그렇다고 영어가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다. 영어도 중요하므로 우
    리는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영어공용화 대신 '좋은' 영어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영어 교육이란 단지 학생들만이 아니라, 관광종사자들이나 필요한 전문인력에게도 해당된다). 영어교육과 영어공용화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제주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쓸 것이다"라는 주장과 제주는 "좋은 영어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영어공영화가 영어능력의 향상을 직접적으로 보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의 영어 교육은 어땠는가? 굉장한 교육열로 영어교육을 시켰는데도 정작 성과는 별로 없었다. 하물며 영어공용화 지역이 된다고 제주도민의 영어능력이 빨리 향상되리라는 기대는 어불성설이다. 즉 제주도민의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공용어화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영어교육 방법의 획기적 개선과 이를 위한 국가차원의 지원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이번 특례법 제정과정에서의) 선결과제라는 것이다.
    혹자는 현재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주로 중국인과 일본인들이라는 점에 비추
    어, 이들을 위해선 관광종사자들에게 중국어와 일본어 교육을 하는 것이 전체 제주도민들에게 영어공부를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는 필요한 사람 각자가 알아서 배우고 오히려 세계의 다양한 언어를 배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위에 언급한 문기성씨는 "영어공용화 보단 제주토속언어경연대회나 신화나
    전설을 재창조하여 관광상품화하는데 주력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제주를 영어공용화하겠다는 발상은 한마디로 제주지역을 '애비없는 자식들의 천국'으로 만들려는 것 같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일갈하고 있기까지 하다.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의 공동대표 이대로씨는 현재 외국인이 많이 오는 국제
    공항과 관광지의 안내문의 잘못이나 바로잡고 외국인 상대하는 사람들이나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등 외국어를 잘하도록 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라며, 영어공용화는 제주도민에게 영어쓰기를 강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관광진흥대책이 많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제주영어공용화는 제주도민들에게 엄청난 부작용과 고통과 불편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나라와 우리말에 이익과 부작용과 피해를 더 줄 것이라 지적한다.

    글을 맺으며

    세계화와 국제자유도시를 거론하며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 '천
    박한 도구주의적 언어관'과 '문화제국주의적 발상'에 빠져 있지 않은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재 제주도 국제자유도시는 '지속가능한 개발', '인간중심의 개발', '지역문화를 보전하는 개발' '지역주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개발', 이 네 가지가 개발의 기본방향으로 설정돼 있다. 이런 기본방향과도 영어공용화론은 맞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가 중시하는 것은 영어공용화론과 '노동이동의 자유화'의 관계이다.
    우리는 제주국제자유도시 구상이 시작될 무렵부터 국제자유도시 구상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노동(사람) 이동의 자유화'이며, 이는 쏟아져 올 값싼 노동력(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동남아인)의 문제, 제주지역에서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설립하게 되는 기업과 제주기업들의 경쟁력 문제, 외국자격증을 소지한 의사·수의 사·회계사·변호사 등이 유입되어 제주지역 주민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우려해 왔다. 이를 가속화시켜 줄 것이 영어공용화론이며, 영어를 못하는 제주도민들이 2등 시민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영어공용화를 반대한다.

    2001. 5. 22

    참여자치와 환경보전을 위한 제주범도민회
    (공동대표 : 김민호 / 조성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