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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향신문] 진보개혁의 위기


  • 4·13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 중순 서울 종로구 안국빌딩의 총선시민연대 사무국에는 하루 300여통의 격려전화가 쏟아졌다.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썩은 정치판을 갈아보자”는 시민들의 해묵은 분노의 분출이었다. 힘을 내라며 한밤에도 국수, 음료수 박스를 들고 오는 시민들도 있었다. 시민들이 후원금으로 수만~수십만원씩 냈다. 한 시민은 3천만원을 내놓았다.













    2004년 2월03일 총선시민연대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발족식을 하고 ‘부패정치 퇴장, 돈선거 추방’ 구호가 적힌 띠를 펼쳐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법 87조를 들어 “불법행위”라고 경고했지만, 총선연대는 오히려 “선거법 87조는 위헌성이 있다. 위법도 불사하겠다”며 거칠 것 없었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90% 안팎의 압도적 국민 지지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86명의 낙선대상자 가운데 59명(68.6%)을 떨어뜨린 선거 결과도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 총선연대 활동이 ‘시민에 의한, 시민의 운동’이었을까. 시민단체들의 시의성 있는 선도적인 활동에 시민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은 맞다. 그러나 지지는 시민동원이었을 뿐 시민참여는 아니었다.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김정수 사무처장은 “총선연대가 정치를 정상화 궤도에 올려 놓았지만 전문가 중심 시민운동의 비정상적 거품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그 거품은 지난 5·31 지방선거 때 확인됐다. 28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2006 지방선거시민연대’가 `막개발, 헛공약'을 선정해 정책선거의 첫발은 내디뎠으나 2000년 총선연대와 달리 주목받지 못했다. 경실련과 매니페스토(참공약)추진본부의 정책선거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6월13일 희망제작소 월례포럼에서는 “시민과 대화가 없었다" "후보의 정책변화에는 역부족이었고,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등 시민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한때 ‘제5부’로까지 일컫던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떨어지고 있다. 시민운동은 국무총리, 장관, 국회의원까지 다수 배출했지만 정작 자신은 쇠락해가고 있다. 정말 “민주화운동이 1990년대 시민운동에 사회적 지위를 내주었듯이 (기존 시민운동이 아닌) 다른 성격의 운동을 조직해야 할 때”(하승창 전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일까. 물론 “시민운동 위기는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거대 단체의 위기이고, 전체 시민사회 운동의 저변은 넓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동네 쉼터인 성미산을 아파트로 개발하는 서울시 방침에 맞서 주민들이 들고 일어선 서울 마포 성미산 운동과 옥천 지역운동 등 주민자치센터, 학교, 복지관, 동사무소와 연계한 시민자치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 시민운동이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서베이리서치센터와 삼성경제연구소가 3년동안 한 한국종합사회조사(KGSS) 결과 2003년, 2004년 연속 1위에 오른 시민단체 신뢰도가 지난해 5위로 4계단 떨어졌다. 지난 6월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KSOI)의 사회단체 정기여론조사도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약칭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변(52.6%)이 ‘신뢰한다’(41.5%)보다 많았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최근 국내 24개 파워집단을 조사한 결과 참여연대의 신뢰도는 지난해에 비해 8위에서 15위로, 영향력은 16위로 4계단 떨어졌다.


     신뢰 추락은 시민단체 인사의 정부 참여 과정에서 불거졌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최근 “비정파를 표방하면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정부조직에 들어간 사람이 은근히 많다. 사람들이 그렇게(정권의 홍위병) 생각하도록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인권재단 양영미 사무총장은 “인권위, 고충처리위, 과거사위 등에 시민단체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참여연대 활동을 하던 이 가운데 상당수가 각종 정부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무총리실이 정책 결정과정에 참고하는 보고서 가운데 참여연대 보고서가 65개(22.9%)로 가장 많은 것으로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사회구조 개혁을 위한 ‘중앙차원의 대변형운동’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참여연대가 과다대표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런 정부 참여는 ‘양날의 칼’이다. 시민단체 활동을 옥죄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연대 지금종 사무총장은 “백배 양보해 고육지책으로 뭔가 바꿔보겠다고 정부에 참여하더라도 사안별로 참여해야지, 고임금 상근직에 몸담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최근 논란중인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출신의 신태섭 KBS 이사와 최민희 방송위 부위원장을 들었다. 지총장은 “신이사는 당연히 민언련 공동대표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부위원장이 7월 방송위에 들어가기 직전(3월)에 민언련 공동대표가 된 것은 우리가 봐도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보수세력에 ‘관변단체’라는 비판을 듣는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꼬집었다.


    시민단체가 정부의 사업비 지원을 받는 방식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인권운동사랑방의 박래군씨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청와대에 있는 사람이 하소연합디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상당수 시민단체들이 개인 인맥을 통해 정부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로비를 하는데 힘들다고요. 더구나 사업비로 다 쓰지 않고 인건비로 전용해 사람을 늘리고 조직을 키웁니다. 그러다 보면, 커진 조직을 굴리기 위해 더 큰 프로젝트를 따와야 합니다. 이렇게 덩치를 키우면 정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게 바로 위기이고 한계입니다.”


    부산발전연구원의 주경미 여성정책연구센터장은 지난달 한 여성운동 토론회에서 그 실상의 일부를 솔직히 설명했다. “여성단체가 정부 보조금을 확보하기 위해 상호견제하고, 지원받기 용이한 활동을 선택적으로 전개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유한 활동영역 개척에 소홀하게 되고, 정부 지원에는 더욱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 고리에 빠집니다.”


    거대 시민단체의 정칟사회개혁 중심 운동의 한계에 봉착한 것 아닌가 하는 논의도 활발하다. 그런 운동이 ‘시민’을 소외시켜 시민운동 위기를 키웠다는 설명이다. 여성민우회 출신의 정강자 인권위 상임위원은 “고작 총론이나 내놓을 뿐 각론에서 전문적 대응을 못한 채 시민운동이 과다대표돼 왔다”며 “분배와 일자리 창출 같은 구체적인 국민의 요구에 더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부족도 시민운동의 위기에 기여하는 큰 요인의 하나이다. 회원으로 등록하고 회비를 내는 것 자체는 시민운동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비를 내는 것에 머물 뿐 실제 참여는 저조하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대체로 회원 90%는 회비만 낼 것”이라고 추정했다. 풀뿌리 시민운동 참여가 전체 인구의 10%를 넘고, 절반은 정기 회비를 내는 선진국과 대조된다. 최근 수년 사이 지역운동은 활발해졌지만 주중이나 저녁시간에 모임을 하면 절반도 참석하지 않는 게 국내 실정이다. 녹색연합 최승국 사무처장은 “바쁜 직장생활 탓에 직접 참석이 어렵다면 항의메일 보내기 등 온라인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마저 안된다”고 전했다.

















    시민단체 회원인 권모씨(47·서울 성동구 성수동)는 “지역문제는 지역단체가 해결해야 할텐데 모든 걸 중앙 조직이 결정하는 식이다. 주민 의견부터 반영해야 지역운동이 발전하지 않겠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구호나 이벤트, 집회 위주의 관성적 운동 방식도 시민의 참여를 막고 운동을 정체시키는 요인이다.


    박래군 활동가는 “평택 대추리나 한·미 FTA 집회 등에 그냥 몇명씩 할당한 이들을 동원하는 식으로 하고 있다. 민주노총뿐 아니라 다른 조직도 비슷하다”고 밝혔다. 과거는 전대협이 동원을 했는데 지금은 그나마 민노총 아니면 동원할 데도 없다. 그는 “결국 시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경찰 저지선 안에서 자기만족적으로 외치는 집회로 끝날 뿐”이라고 말했다.

    대규모 연대집회에 맹목적인 ‘사람 대주기’도 여전하다. 또 “머릿수가 힘이라는 식으로 연대의 목적에 대한 성찰 없이 거대단체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려고 몰려드는 행태”(양영미 사무총장)도 그렇다. 지난해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의 시민사회지표(CSI) 연구결과 시민단체간 연대 활동은 80.9%가 매우 활발하다고 긍정 평가한 반면, ‘실질적인 의사소통은 부족하다’는 응답이 44.6%나 됐다. ‘숟가락’만 올려놓는 형식적 연대 활동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대목이다.


    일반 시민참여 부족은 만성적 재정 위기의 중요 원인이 되고 있다. 한국시민사회단체편람에 나타난 시민단체의 회비 수입 비중은 대체로 전체 재정의 40% 이내다. 1만5천명 회원의 참여연대는 연회비 비중이 84.9%로 높은 편이다. 회원 3만5천명의 경실련은 33.3%에 그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처럼 회원수도 늘다가 정체 상태다.


    이렇게 회비 부족으로 재정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들이 동원되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환경재단은 한 호텔에서 후원행사를 열어 ‘어린이 환경기금’ 명목으로 기업들에 공문까지 보내 1백만~1천만원의 후원금을 요청, 구설에 올랐다. 경실련은 2000년 1월 11주년 기념식 및 ‘후원의 밤’ 행사에 앞서 주택공사와 석유공사 등 13개 정부투자기관에 1천만원씩을 요구하는 지원요청서를 보냈고, 일부 기업은 2백만~5백만원씩 후원했다. 이는 며칠 전에 이들 기관장의 판공비 사용내역 등의 정보공개를 요청한 뒤였다.


    참여연대도 올 4월 새 사무실 이전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에 850개 기업체에 최고 5백만원의 후원금 약정서를 돌렸다. 기업체 편법상속 조사 결과 발표를 앞둔 시점이었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기업 후원을 받는 어떤 환경단체는 운동을 시늉만 하고 말더라”며 “기업 돈을 받는 순간 운동의 정당성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의 열악한 환경과 불투명한 비전은 새로운 활동가의 충원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요즘 시민운동가 사이에서 “인적 역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어렵다. 지쳤다”는 말이 점차 늘고 있다. 한 인사는 “노동판에서 시민운동으로 갔던 사람들이 시민운동을 떠나면서 시민운동은 완전히 사양길”이라고 진단했다. 참여연대 출신인 양영미 총장은 “2000년 낙천·낙선운동 뒤 참여연대가 4명 신입을 모집할 때 400명이 지원한 것은 이미 옛날 일”이라고 전했다. 인력구조상 허리인 30대 활동가의 대거 이탈로 비상이 걸린 상태이다. 처우도 열악해 참여연대의 경우 지난 5년 동안 처장급이 월 1백40만원, 활동가는 85만~1백만원 남짓에 묶여 있었다. 지난해 5월 ‘시민의신문’이 시민운동가 201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월평균 급여 50만~1백만원이 49.8%로 가장 많았다. 김혜정 사무총장은 “과거 시민운동이 잘 될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욕먹고 박봉에 불안한 미래를 감수할 신념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지 못한 것도 일반인과 운동을 갈라놓고 있다. 총선·대선·대통령 탄핵·새만금·방폐장 등 현안에 급급하게 대처하면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의 경우 국가의 도로교통정책이나 에너지정책에 대한 근본 문제제기와 대안 제시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은 “결국 담론과 리더십의 위기”라고 인정했다. 대전 참여자치시민연대 김제선 사무처장은 “절차적 민주주의 위주로 운동을 하다가 사회양극화, 고용불안 같은 시민의 고통에 시민운동의 대응이 취약한 것이 위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전병역·장관순기자 junby@kyunghyang.com


    ※ 이 기사는 '경향신문'  기획기사로 연재되고 있는 [진보개혁의 위기] 중에서 지난 10월 29일 개재된 기사를 퍼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