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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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기행(4)] '민주화의 섬' 광주를 가다

  • 여행 5일째, 순천, 구례를 거쳐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 도착했다.




















       
     
     

    이번 제2회 청년평화순례는 5.18기념재단의 후원이 매우 컸다. 5.18기념재단은 1994년 8월 30일, 광주시민, 해외동포를 포함한 온 국민의 기금과 관련 피해자들이 정부에서 받은 보상금을 보태어 설립되었다. 총무팀을 비롯, 국제협력팀, 교육사업팀, 학술자료팀, 문화 홍보팀으로 조직을 구성하여 다양한 학술, 연구, 교육, 국제, 문화, 연대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년에 운용하는 돈이 24억에 이른다 하니 사업의 방대함과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그 만큼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국민적 공감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사업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교육 사업이었다. 청소년 연극제, 청소년 인문학 교실, 5.18사적지에서의 체험학습, 5.18 청소년 문화제인 레드 페스타, 전국 고등학생 토론대회 등의 청소년 문화체험을 실시하고 있었다.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민주화를 쟁취하게 위해 피 흘렸던 광주의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이면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다시 되풀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이 시대의 책임감이 느껴진다.


    영상기록물을 보는 시간이 있었다.


    1994년 망월동 묘지에서 시신을 옮기며 통곡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내 가슴이 젖어 든다. 죽은 이가 어린 고등학생 쯤이나 되었던 것일까, 이제 늙어 버린 어머니가 뼈만 남은 아들을 부여 잡고 운다. 5.18 당시의 내 나이도 그 고등학생 쯤이었다. 내가 광주에 살아 저렇게 죽었다면 내 어머니 또한 저렇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 가슴으로 아들을 먼저 보낸 세월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살이 녹아 없어져 버린 아들의 뼈에서 흙을 훑어내며 살아온 아들을 만지듯 오열하는 어머니. 나 또한 지금은 저 만큼 키워 놓은 아들이 있으니, 내 아들이 저렇게 억울하게 죽어 앙상한 뼈와 해골로만 만나게 되었을 때를 상상하게 한다. 영상 속의 어머니의 오열이 평화 기행팀의 학생들과 나에게도 퍼져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머니의 울음이 오래 남는다. 오늘도 아들을 떠올리며 울고 있을 어머니, 그리고 광주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




















      
     
     

    # 국립 5.18묘지


    80년의 봄, 광주에선 계엄군의 총칼이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고 서슬퍼런 공포 속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주검을 수습해 청소차에 싣고서 이 땅을 찾았다.


    5.18묘지 성역화 공사가 완공되어 희생자들을 인근에 조성된 5.18묘지로 이장하기 전까지 이곳은 '망월동 묘지'로 불렸고,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곳은 현재 80년 이후 5.18 정신 계승운동을 하다 희생된 민주인사의 묘가 안장되어 있고, 새로 단장한 5.18묘지로 5.18 희생자들의 주검을 이장한 후에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5.18의 정신을 보존하고 관리하고 있다. 헛묘라고 하고 구묘라고 하는 까닭은 저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고 지금은 새자리로 떠났다는 의미이다.


    비록 저 풀덮인 땅엔 그들의 몸은 비워져 옮겨 갔을 것이지만, 그리고 새로 몸 누인 그 땅에서도 지금은 흙으로 돌아가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겠지만, 어찌 시간을 보냈다고 그들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질 것인가. 그래서 어떤 공간은 기억을 확보하며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다.




















       
     
     

    묘역을 돌아오는데 돌무더기 하나가 눈에 뜨인다. 언제부턴가 이 곳을 찾는 이들이 하나 둘 모았을 돌들, 어쩌면 젊은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가슴에 놓여졌던 무거운 돌덩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어머니는 세월의 회한을 어쩌지 못해 기도처럼 돌을 하나씩 얹었던 것일까, 또는 누군가의 무거운 눈물처럼 보이기도 하는 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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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봉안소, 억울한 죽음과 위로


    전통고분인 고인돌 형태의 봉안소엔 영정과 위패로 가득했다. 대개의 죽음은 5월 21일과 27일에 몰려 있었다. 5월 21일 계엄군은 도청앞에서 계엄당국의 사과를 요구하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하여 도청앞 금남로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었고, 27일 새벽엔 탱크를 앞세워 최후항전을 하던 전남도청의 시민군을 무력진압하였다.


    계엄군은 시민군을 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라 불렀고, 폭도의 무리를 없애 이 나라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외치던 이 고장은 빨갱이가 득실대는 도시로 낙인찍히더니 계엄군의 무력은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정당하게 이 도시 사람들을 학살했다.




















       
     
     

    국가의 총칼은 국민의 몸을 찌르며 언제까지 자신들의 행동이 국가를 위하고 평화를 위한 일이었다고 믿을 수 있었을까? 그 당시 계엄군이었던 이의 가족 중에는 이 5.18 묘지를 찾아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기도 했다고 안내자는 전한다.  5.18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동생이 제대를 하고 정신병이 걸리더니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으니 계엄군의 가족은 동생을 대신 해서 광주 사람에게 미안하고, 동생 또한 억울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했다 한다.


    그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이는 상부로부터 광주 시민을 진압하라고 명령 받았을 때 보통 때 쓰던 진압용 곤봉의 3배 가까이 되는 것을 지급 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사람 죽일 무기를 군인들에게 쥐어준 셈이다.




















       
     
     

    같이 이곳을 참배하던 학생들은 광주 시민의 마음이 되어 억울하고 원통해 하며 제주의 4.3을 떠올리기도 한다. 모두 국가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그러나 4.3 평화공원의 사진 없는 위패는 쓸쓸해 보인다. 달랑 이름 하나 올려진 위령소에선 이름 석자만의 글자로는 우리에게 있었던 역사적 진실이 너무 멀어 보인다. 한 마을에서 여러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남은 4.3의 위령소에 비해 5.18묘지에서는 그가 언제 죽었는지 죽을 당시에 몇 살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곳 5.18묘지 위령소에선 참배객들이 죽은 이들에게 묶인다. 위령소의 사진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지만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응시 하면서 잊지 말라고 애원하고 잊어선 안 된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 나라는 이렇게 함부로 국민을 버렸었다고 그러니 자신을 지키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권력에 눈 먼 자들과 그들의 계략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민주 시민의 힘이 성장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건네는 것 같았다.




















       
     
     

    위령소에는 그 때 목숨을 잃은 300여명의 사람들과 5.18 이후에도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쇠잔하여지다가 병들어 죽어가는 이들의 공간도 한 켠에 마련되어 있었다. 잘못된 역사는 끈질기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4.3 또한 그러했다. 4.3 사건으로 죽은 사람과 죽은 사람의 가족과 그 가족들이 살았던 마을의 사람들이 상처의 세월을 간직한 채 살았다.그러나 4.3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너무 오래 침묵되어 그랬던 것인가, 4.3 평화공원의 위령소는 억울한 죽음이 지금 살아 있는 우리를 향해 건넬 말을 묵살시켜 버리게 만들어진 것 같다. 나의 외할아버지의 위패만 해도 그랬다. 오래 전 일이라 사진도 없고 오래 전 일이라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인가, 외할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나는 외할아버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이름 석자가 낯설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5.18묘지와 위령소를 보면서 4.3을 떠올리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일행 중에 한 사람은 5.18묘지를 떠나오면서 "부럽다!" 라는 말로 모든 감회를 대신했다. 광주시민들에게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부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 5.18 추모관


    5.18 추모관은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민주영령들을 추모하고 그 뜻을 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관람 안내서에는 나와 있었다.




















       
     
     

    이 추모관의 주제는 '진실, 기억, 부활'로 추모 공간과 기록 공간, 상징 공간과 교육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5.18 민주화 운동의 은폐되고 왜곡된 진실을 복원하여 객관적 사실로서 현재화하고자 하였다. 진실을 확인하면서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를 바로 잡고 5.18 민주화 운동의 가치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뿌리내리려는 게 이 추모관의 건립 목적이다.


    빛의 시작, 한 줄기 눈물, 역사의 창, 역사의 강물, 참여의 문, 기획 전시실, 자료실, 영상실, 기획 영상실, 음악 쉼터 등으로 공간을 분할해 5.18 사건의 전체 개요를 알게 하고 그 당시의 물품과 사진들을 현장감있게 전시하였다. 그리고 1980년 5월 27일 이후의 상황에도 초점을 맞추어 그 이후의 민주화 투쟁의 기록 등도 보여 준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해서 역사의 진실 한 귀퉁이라도 알게 된 아이들은 '전두환 빌어먹을 새끼' 라고 이렇게 그들을 단죄하고 있는데,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지금 그들에게 내린 저 엄한 벌은 어떻게 가벼워져버린 것인가.


    우리는 또 너무 빨리 잊고 너무 쉽게 용서해 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 나라의 권력은 죄와 벌을 정치적으로만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여전히 우리 국민은 부패하고 무자비한 권력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하는 약한 자들일지도 모르겠다.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역사의 단면이다.




















       
     
     

    그리고 돌아나오다 처음 들어가면서 눈여겨 보지 못한 코너를 한 군데 다시 보게 되었다. 입구 쪽의 '한줄기 눈물' 코너, 역사의 벽 공간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킨 민중의 역사' 라고 제목이 달려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의 호남 의병의 활동부터 동학 농민 운동과 1960년대의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 까지 사진과 설명을 전시해 있었다.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킨 민중의 역사에 의병활동과 농민운동과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이 있었다는 것에 충분 공감한다. 그렇다면 제주의 4.3은 무슨 운동이었지? 두 번을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4.3에 대한 언급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이상하게 여기고 로비의 안내데스크에 가서 왜 4.3은 저 곳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상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되려 나를 불편하게 여긴다. 그 전시는 호남지역의 운동에 관한 것만 전시했다는 답변이다.


    그렇다면 4.3사건 전의 여순사건은 어떻게 되죠?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또 4.3사건 당시는 대한민국 제주도라기 보다는 호남권의 제주였던 것도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데스크의 사람과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논하겠는가. 나 또한 역사에 눈이 어두운 것을.


    집에 돌아와 이 추모관의 안내서를 보다가 다시 하나 발견했다. 안내서 역사의 벽을 설명하는 공간에는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킨 민중의 역사'라고 쓰여진 자리에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 또한 없었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 전시관이 2007년 5월 14일에 개관한 것에 비추어 그리고 이 안내서 또한 그 즈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면 아마 이 역사의 벽은 처음엔 호남지역을 중심해서 내용을 만들었던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다가 급히 제목을 바꾼 것이다.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래서 전시관 안의 역사의 벽 제목은 바뀌었고 추모관 안내서엔 그대로 호남지역 중심주의의 문장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내인은 왜 나라를 지키는 민중의 역사에 4.3의 역사가 빠졌느냐는 관람객에게 이 공간은 호남 지역 공간이니 틀린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람객도 그 역사의 벽에서 우리나라 민중의 역사를 보이는 것으로 알 것이다.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킨 민중의 역사'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이 또한 씁쓸한 일이다.


    게다가 호남지역의 민주화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여순사건도 다루었어야 했다. 그리고 나라를 바꾼 민중의 역사에 대해 말하려 그래도 제주 4.3은 말해져야 옳다.


    이대로라면 이 곳 민주화의 성지라고 하는 광주의 추모관을 찾아 온 외국인이거나 요즘의 아이들은 우리 나라 민중의 역사에 4.3은 없는 일이 될 것이고, 호남지역의 아이들도 그 지방의 역사에서 여순사건을 모르게 될 것이다.


    이 추모관이 역사적 진실을 기억하고 부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지어졌다면 더 솔직하게 역사를 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광주시민의 아픈 역사로서 5.18을 기억하고 그 슬픈 역사를 부활시키려 한다면 역사적 진실의 부활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모두 제대로 이야기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5.18 추모관은 추모관 건립의 심려한 문장이 말하는 것과 실지가 다르다.


    어떤 것은 이야기 하고 어떤 것은 간과 해 버리거나 어떤 것은 크게 이야기 하고 어떤 면은 모른 척 해 버린다면 어디 그게 역사의 부활이 될 것인가, 죽음의 부활이 새 생명이라면 역사의 부활은 진실의 거듭남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하여 광주 5.18은 4.3에 대해서, 4.3의 진실과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거듭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것인가.


    추모관을 나오며 나는 이 나라 민주와 평화의 길이 사실은 아직도 머나먼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전체적으로 잘 꾸며지고 의도가 좋은 이 공간에서 4.3사건이 싹 빼져서 민중의 민주와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 것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아주 작고 미소한 한 구멍이 강둑을 무너뜨리듯 어떤 왜곡이 이 잘 지어진 건물과 건물 속의 이야기에 스며있는 것 같은 의심이 든 게 사실이었다.




















       
     
     

    광주의 5.18은 우리 나라 현대사에 되돌릴 수 없는 상처이지만, 이 지역과 시간을 넘어야 한다. 또한 이 지역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 그러니까 계엄군으로서 죽어간 젊은 영혼들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엔 아직 너무 가까이에 있던 무참함, 용서를 말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먼 후일엔 나를 넘어서고 지역을 넘어서서 희생과 상처를 어루만져야 한다. 개인이든 역사이든 부활이 제 의미를 다하기 위해선 거듭남의 지혜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끼리의 평화와 공동체의 민주성이다. 5.18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의 진정성은 이 시대와 다음 세대의 평화와 민주를 위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는 데 있다. 자주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자문해볼 일이다. 과거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에서 나는 어떻게 서 있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개인과 국가가 모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