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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뿌리뽑힌 자유의 여정, 그리고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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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연 먼지 길”, “절제, 솔직함, 발랄함”
    체 게바라가 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전체에 드리운 인상이다.
    이 여행기에 해설을 붙인 한 필자는 체의 다이어리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포데로사 Ⅱ를 타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난 여행에 대해 써  내려간 메모들이다”


     체 게바라는 이미 전설이 돼버린 인물이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쿠바혁명의 성공을 이끌었고 아프리카의 해방운동을
    지원했으며, 볼리비아 혁명의 와중에 살해되었다.    39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지원하듯 그의
    생은 굵고 격렬해 보인다. 20세기가 지난 지금껏 ‘젊음의 상징으로, 가슴깊은 곳의 신화로, 또한 영원한 '체(che, 동지, 친구)'로
    기억되는 것은 그가 혁명의 영웅이었던 까닭일까?


     그의 ‘발길 닫는 대로의’, 그러나 진실을 향한 분명한 생의 여정이 보여준 그 열정이 젊음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닐까? 
    ‘혁명’은 그야말로 진실의 여정에서 체득된 자연스런 결론이 아니었을까? 혁명 영웅의 호칭은 그에게 붉은 별이 박힌 모자와 같은
    당연한 치장인지 모른다.


     체 스스로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에 썼듯 이 이야기는 “대단한 영웅담이 아니다” “비슷한 꿈과 희망을 갖고 한 동안
    같이 지낸 두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여정의 무엇이 그를 혁명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일까? 무엇을 발견한 걸까?


     그의 친구 알베르토와 시작한 그들의 여정은 처음에는 북아메리카를 향했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은 자신의 조국 아르헨티나가 속한
    남미의 빈곤과 어두운 그늘만을 확인했다. 그 확인의 대가로 음습하게 다가온 무력감은 과연 북아메리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북미의 번영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던 여행은 “여러 개의 불안정하고 실체가 없는 나라들로 쪼갠다는 것이 완전히 허구”라는 범아메리카주의의
    거듭된 발견을 재촉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칠레, 칠레에서 페루로 이르는 동안 초라함과 더러움, 고통의 체증은
    다를게 없었던 것이다. 갈수록 그것의 발견은 외면할 수 없는 현장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국경을 가르는 국가의 존재는 이제 불필요한
    것이었다. 의사로서 체에게 치유해야 할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사회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칠레의 거친 사막에서 노동자 부부와의 만남. 어린 자식마저 내맡기고 추키카마타 광산을 향한 그 불행한 노동자 부부로 부터 체는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냉혹한 효율과 무기력한 분노가,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함께 손을 잡고 그 거대한 광산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편은
    생존 때문에, 다른 한쪽 편은 이윤을 위해 ...”


     하지만, 이 여정에서 체의 발견은 아직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모른다.


       “언젠가 우리는 광부들이 노동의 대가를 즐겁게 받아가고 먼지 낀 폐를 웃음으로 씻어낼 날을 보게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것이 세상 저쪽, 붉은 빛이 퍼져 나오는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다고 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것이 체로 하여금 모터사이클 여행이 끝난 바로 이듬해 또 다른 여정을 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또한 그는 남미대륙
    여정의 과정에서 얻은 ‘거친 교훈’으로 몇 년 뒤 쿠바에서의 자신의 예기(豫期)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불투명하지만 명백해
    보이는 확신은 여정의 한창인 1952년 3월에 쓰여진 이 간단한 한 마디로 드러난다.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무엇이 그에게 보게 되리라는 확신을 제공했을까?
      무거운 짐의 행보, 풍찬노숙의 연속,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 천식의 습격, 열병의 고통. 그 속에서도 “아무리 나쁜일이 일어난다 해도 먼저 주눅들 필요는 없지”하는 굳은 그의 다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여행 직전 그의 여자친구 치치나와의 이별을 이야기하는 장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나는 나의 커다란 뿌리들이 뽑혀 자유롭게 되었음을 느낀다”


     뿌리뽑힌 자유. 이것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진정한 용기란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유는 새로운 발견을 늘 예고하며 발견은 변화를 주도하기 때문이다. 그 발견의 여정에서 커다란 고통도 발견의 부속물일 따름이다. 당연히 주눅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여행 이후 전혀 예기치 못한 또 다른 자아로 귀환한다.


        “아르헨티나 땅에 (다시) 발을 디뎠던 그 순간.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이 글을
    구성하며 다듬는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게바라가 살았던 시대보다 현재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더 이상 우리에게 진실의 길로 들어선 혁명가는 필요없을까? 남아메리카,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민중들은 지금 체가 ‘사막의 밤’을 함께 보낸 그 노동자 부부의 고통을 덜어낸 삶을 살고
    있을까?
     소외와 박탈에 아파하고, 가난으로 인한 자살마저 자연스런 불행으로 여기는 우리사회와 체가 겪었던 당대와의 시대 간극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체 게바라의 차녀 알레이다 게바라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서문의 마지막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마 21세기에 지속되는 체
    게바라의 ‘붐’은 그녀가 밝힌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혹, 여러분이 실제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갈 기회가 생긴다면 슬프게도 아직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으며, 심지어는 더욱 나빠진 것들도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불의에 굴복하지 못하는 체 게바라처럼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젊은이라면, 그리고 더 공평하게 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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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덧붙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해설을 쓴 신티오 비티에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이 말을 강조하고 싶다.


      “ 만약 우리 자신을 나병 치료에 진정으로 헌신하게 만들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환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애정일 것이다”


      만일 ‘나병’을 모든 인간적 불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꿔 이해한다면, 당시에 체는 그 헌신이 얼마나 진지하고 깊은 것이어야
    하는지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나환자가 불행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헌신했던 것이 아니라, 관계의 애정이 자신의 헌신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얼마 전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남긴 정년 퇴임의 메시지가 와 닿는다.
    "각박한 이론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비판적 담론이 따뜻한 가슴과 만나야만
    진정한 의미의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체의 헌신을 유발한 나환자들의 애정은 또한 체의 따뜻한 시선이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