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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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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조선 초 우리나라 해안에는 왜구의 출몰이 거셌다. 최영 장군과 이성계도 나서서 왜구를 막아냈다. 조선 초 대마도 정벌도 왜구 침탈에 대한 응징이었다. 일본은 늘상 태풍 피해를 입는 쌀 부족 국가였고, 그래서 주변 국가를 노략질했다. 조정은 일본에 일정량의 쌀 수출을 약속하고 나서야 왜구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먹고 남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조정은 일본에 쌀 수출을 결정하고 평화를 얻었다.

    조선이 건국된 지 꼭 200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의 침탈은 전에 겪지 못한 큰 충격이었고 치욕이었다.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애쓴 덕분에 승리하였지만, 전쟁 자체가 남겨 준 패배의 상처는 컸다. 왜는 전과를 남기기 위해 사상자의 코와 귀를 베어 갔다고 한다. 지금도 교토에는 귀무덤이 남아 있다. 전란에 수많은 포로들이 잡혀갔다. 이 포로 송환을 위한 조정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우리에게 엄청난 치욕을 안긴 왜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것 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조정은 왜와 화해를 택했고 친선교류를 시작했다.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여 포로들 송환에 나섰고, 이후 그 교류정신은 이어졌다. 조선은 전쟁의 피해를 잘 알았고 그래서 평화를 선택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일본이 크고 강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또 다른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자극해선 안 되고 평화 화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곁의 중국을 잘 모시는 일도 외교적 전략이었다.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명과 청을 친선외교로 대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많은 문물을 접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발명한 어떤 것이라도 금세 받아들이면서 소중화를 꿈꾸기도 했다. 중국은 자신과 닮아 있고, 자기네 문명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조선에 놀라기도 했다. 조선의 장점은 측우기를 발명한 것도 한글을 발명한 것도 아니다.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던 유연한 태도에 있다. 우리나라의 장점은 남의 것을 잘 받아들이고 얼마 후에는 자기화하는 개방성과 유연성이다. 그래야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조상의 장점을 잘 계승하여 이웃 나라와 잘 지내고 있는가. 어느 정도는 그렇고 어느 한 편에서는 아니다. 지금도 중국과 일본은 강대국이고 패권주의와 파시즘을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주변국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을 지금도 따라야 할까.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군비증강을 하더라도 그들을 능가할 수 없다. 우리는 10만을 훨씬 넘는 60만 대군을 지녔지만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을 앞지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강해지면 안전해지고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력은 무력으로 지켜낸다는 논리와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바로 우리 조상이 얻은 지혜를 되살려 우리 상황에 맞게 재창조하면 된다. 그것은 평화를 만드는 방법이다. 우리의 장점은 평화를 만드는 방법을 잘 안다는 것이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는 평화를 만들고 있는가. 북한이 핵 개발을 하면 우리도 덩달아 핵을 이야기하고, 북한이 위성을 쏘아올리면 덩달아 위성을 쏘아야 한다고 조급해하지 않았던가. 이젠 대양 해군을 위해 제주에도 해군기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 안위와 평화를 위해 군사력 증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평화를 지켜내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시민단체가 나섰다. 강정 주민과 30여 개 시민단체와 양심적인 제주도민이 나서서 평화는 군사기지가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지키자고 나섰다. 그래서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이는 김태환 도지사를 주민소환운동으로 응징하고자 했다. 그러나 참패했다. 제주도민의 3분의 1이 투표에 참여해야 하는데 고작 11%였다. 시민단체는 자숙하면서 지금의 민주주의와 소통하는 법을 다시 캐물어야 한다.

    사실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도지사가 제주도민들을 향해 투표장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투표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공무원과 이장을 동원하여 투표하는 민주주의를 부정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음 선거에 심판해 달라고 도지사가 부탁한 것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내년 도지사 선거에서 투표장에 가지 말자고, 투표하지 말자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꼭 투표하여 도지사를 응징하지고 할 것이다. 과거 공무원을 선거에 끌어들여 범법자가 되었지만, 죄를 지었지만 감옥에 가지 않게 된 도지사가 벌을 받고 제주도민에게 석고대죄하는 날을 만들 것이다.


    이번 주민소환 운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매우 주목할 몇 가지 의의를 남겼다.

    첫째, 지방행정의 독단에 저항하며 광역자치단체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주민 소환을 시도했던 점이다. 강정이 해군기지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절차를 어겼던 점을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한 나름의 소중한 기회를 가져 보았다.

    둘째, 국가주의에 도전하고 그 틀을 벗어나기 위한 실험을 감행하였다. 애국 애족주의야 기리고 중히 여겨야지만, 국가를 위해서는 개인은 희생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이번 선거는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관념을 깨기 위한 의미있는 시도였다.

    셋째, 개발 위주의 신자유주의에 도전하고 지역의 자연적 인문적 환경을 중시한 계기를 만들었다. 군사기지 건설도 개발사업이고 이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헛된 생각을 깨트리려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넷째, 제주인의 트라우마에 도전하면서 그것을 깨트려 보려고 한 점이다. 4.3처럼 국가에 대응하면 망한다는 고정관념이 제주도인을 지배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독재정권의 망령이 아직도 이 땅 제주에 남아, 국가와 지방정권에 저항하면 다친다는 저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첫 몸부림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평화를 갈구하는 제주도민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평화를 단계적으로 만들어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 길을 향한 첫걸음을 뗀 셈이다. 동아시아의 평화, 세계의 평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제주도민은 지속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평화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제주도민과 함께 그 길을 갈 것이다. 평화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정주민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평화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제 시작이다.


    허 남 춘 (제주참여환경연대 이사, 제주대 국문학과 교수)


    -제주참여환경연대 기관지 제49호 참세상만드는 사람들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