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감시·대안·참여·연대를 지향합니다.

  • 누군가를 위해 한번쯤 뜨거운 사랑을

  • 환경과 평화 그리고 슬로시티-16


     


    누군가를 위해 한번쯤 뜨거운 사랑을


     


    ‘행복’을 이야기하면 촌스럽다고 한다. ‘희망’ 혹은 ‘평화’를 이야기해도 반응은 마찬가지다. 두 글자로 된 단어는 이제 역사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부자 되는 법’이거나 ‘개고생해도 돈 버는 법’이라야 눈길을 붙들 수 있다. 길거리 간판도 마찬가지다. ‘친구’라거나 ‘우정’ 정도면 촌스러운 곳으로 낙인찍힌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혹은 ‘친구의 어깨가 외로워 보이는 날 건배’ 정도는 되야 손님을 끈다. 책 제목이나 영화 제목도 그럴 것이다. “마라도 억새는 바람에도 눕지 않는다” “바람부는 날 나는 압구정에 간다” 정도는 돼야 세인의 관심을 끈다.


     


    정말 ‘행복’을 이야기하면 촌스러운가? 32년 동안 은행원으로 일하며 중역까지 지낸 사람이 은퇴하고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나서야 진정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는 기사를 오늘 읽었다. 왜 그는 32년 동안 행복을 모르고 지냈을까. 왜 직장과 일밖에 모르고 지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도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내와 열심히 돈을 벌어 아파트를 사던 날,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대견해 하던 날, 부장으로 진급하던 날 등등이 있었을 것이고, 그 날들은 점점으로 존재하지 않고 직선처럼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 먹고 나서가 문제였다.


      배려.jpg


    이제 더 이상 그런 일들은 자기로부터 연유하게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주가 태어난다거나 아들이 진급한다거나 손주의 재롱으로 행복해지는 일만 남았다. 이제 행복은 나의 움직임을 따라 직선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결국 자신과 가정을 위한 삶은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허나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봉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한 길에서 벗어나 남을 위한 봉사를 이어가는 순간부터 그는 행복을 찾았다고 말했다. 큰 변화 아닌가. 우리는 32년을 허비하지 말고 그 지름길을 찾자. 그런 깨달음을 전해주는 곳이 생겼다. 바로 ‘희망제작소’(박원순 변호사)다. ‘봉사’를 통해 ‘희망’을 찾아나서는 곳에 ‘행복’이 서 있었다. 무미건조한 두 글자 단어가 생동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어느 아프리카 케냐의 의사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 힘든 의대 수련과정을 견디고 돈을 벌 수 있는 자리에 왔건만, 그는 시골의 가난한 사람을 택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남을 위한 봉사는 돈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사는 보람이 느껴진다고 했다. 사람 사는 일 중에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가 아닌가.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기’는 어렵다. ‘정승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기’는 무척 어렵다. 대부분 ‘개같이 벌어 개같이 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32년의 개같은 인생을 벗어나는 길이 남을 위한 ‘봉사’와 ‘보람’에 있었다.


     


    신문 독자란에서 읽은 어느 장애인 구두수선공의 일화가 생각난다. 충청도에서 잡화상을 하던 주인은 자신의 가게 앞에서 이 장애인 구두 수선공이 일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의 자녀가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이 구두수선공도 축하하기 위해 전세버스에 오른 모양이다. 그런데 서울을 가고 오는 동안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단다. 가게 주인이 구두수선공에게 왜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지, 화가 났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구두수선공의 말, “남의 좋은 잔치에 많이 먹고 화장실에 간다고 차를 세워달라는 불편을 혹 끼칠까봐 먹지 않았다”고 했단다. 남을 위한 배려와 보답이 감동적이다. 인생은 이렇게 “베풀고 보답하는” 모습이 제일 보기가 좋다.


     


    우리 사회는 남을 위한 일이 손해보는 일이라거나 어리석은 일이라고까지 여긴다. 특히 여성에게서 그렇다. 엄마에게서 더 그렇다. 자기집 아이가 남을 배려하는 일보다는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오르는 것이 엄마들에겐 최고다. 남을 밟고 올라서서 1등이 되는 것이 어마들의 기쁨이다. 그러니 이것을 현명한 어머니(賢母)라고 추앙해야 옳을까. 진보적 여성들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은 죄악처럼 여긴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중세 보수 ‘꼴통’들의 삶이라고 단정한다. 좋은 아내(良妻)보다는 악처가 되어 열심히 돈 벌고 아파트 투기하길 남편도 바라는 것은 아닐까. 아이와 남편을 위해 사는 희생적인 삶도 아름답다. 그러나 진정 아름다운 삶은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사는 길이다. ‘희생’과 ‘봉사’라는 의미가 ‘희망제작소’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어 기쁘다. 누군가를 위해 한번쯤 뜨거운 인생을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우선 누군가를 위해 한번쯤 뜨거운 사랑을 해보라.


     


    압구정에 가는 아이에게 묻는다. 거기에 가면 비상구가 있는 거니? 마라도 억새가 바람에 누으면 넌 울면서 소주에 취할 거니?


     


    허 남 춘 (제주대 국문학과 교수)